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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케이프 코드(Cape Cod)를 찾아서

메이플라워호 이민자들이 첫발을 내디딘 곳

by 보현


케이프 코드(Cpe Cod)는 매사추세츠주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곶으로서, 대서양 쪽으로 갈고리 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는 반도이다. 우리 말로 하자면 ‘대구 곶’이라는 뜻이다. 이 근처에서 대구가 무지무지 많이 잡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내가 나의 저서 <사피엔스의 식탁>을 쓰면서 케이프 코드의 대구산업을 언급한 바 있기에 미 동부 지역을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케이프 코드를 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1620년 필그림 파더스라고 일컬어지는 청교도 이민자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처음 기착한 곳이 바로 이곳 케이프 코드였다. 그래서 보스턴에 가는 길에 케이프 코드 일정을 넣어줄 것을 딸과 사위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케이프 코드에 별 볼 것도 없다고 시들해하는 딸과 사위에게 그곳에 가면 랍스터를 마음껏 먹게 해 주겠다고 꼬드겼다. 메이플라워호의 이민자들이 황량한 이 바닷가에 처음 도착하여 기아에 허득일 때 바닷가에는 커다란 랍스터들이 철거덕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어느 책 내용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케이프 코드: 대서양 쪽으로 갈고리 모양으로 돌출된 모양이다.


케이프 코드로 가는 도중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랍스터 요리를 샀다. 검색을 하였더니 채텀(Chatham)의 <Mac’s Chatham Restaurant>이 명성이 있는 식당이라고 나왔다. 그래서 그곳에서 싱싱한 굴과 랍스터요리를 먹었다. 이곳의 홍합요리가 아주 훌륭하였다.


Chatham에서의 맛있는 점심 식사


케이프 코드(Cape Cod)와 대구(Cod)

케이프 코드의 끝 자락에 위치한 프로빈스 타운까지는 한없이 펼쳐진 사구 길을 달려야 했다. 길 오른쪽에는 대서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내 마음속에는 옛날 이 바다에 몰려와 키보다 더 큰 대구를 잡아 올리던 강인한 뱃사람들이 떠올랐다.


캐나다와 미국의 동부지역은 일찍부터 대구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유럽에 알려졌다.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 대구>를 쓴 마크 쿨란스키에 의하면 이곳에서의 대구잡이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인들이라고 한다. 바스크인들은 먼바다 어디에선가 엄청난 대구를 잡아 중세 유럽에 필요한 생선(중세에는 금육제를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생선의 수요가 높았다)을 공급하였는데 그들은 어디서 그 많은 대구를 잡았는지에 대해 절대 함구하고 있었다.


1534년, 프랑스의 탐험가 쟈크 카르티에가 캐나다 동부 연안의 세인트로렌스강 하구에 도착했을 때 1천 척의 바스크 어선이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스크인들의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쟈크 카르티에가 그곳에 도착하기 37년 전인 1497년, 조반니 카보트(영국식으로 존 캐보트)라는 사람이 영국왕 헨리 7세의 지원을 받아 서쪽으로 항해하던 도중 거대한 바위투성이의 해안을 발견하고 이 새로 발견한 땅(New Found Land)을 영국 땅이라고 선언하였다. 캐보트는 그 땅에 양동이로도 잡을 수 있을 만큼 물고기가 우글대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케이프 코드를 가장 먼저 인식한 사람은 플로랜스인 조반니 베라차노였다. 1524년 프랑스 국왕의 후원을 받아 오늘날의 노스캐롤라이나로부터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한없이 올라가던 그는 팔 모양의 돌출된 곶을 발견하고 이곳을 팔라비시노라고 명명하였다.


베라차노의 모험 뒤, 78년이 지난 1602년, 영국인 탐험가 바톨로뮤 고스놀드(Bartholomew Gosnold)가 다시 아시아에 이르는 항로를 찾아 나섰다. 고스놀드는 노바스코샤를 지나 남쪽 해안선을 따라 아래로 항해를 계속하였다. 가도 가도 해안선만 마주한 그는 결국 아시아로 가는 길을 포기하였지만 자기가 발견한 땅에 뉴잉글랜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조반니 베라차노가 발견하고 명명한 팔라비시노에 케이프 코드(Cape Cod)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가 항해하는 동안 어떤 물고기 떼가 항상 그의 배의 진로를 방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물고기가 바로 대구였다. 고스놀드의 모험을 근거로 영국이 이 지역(뉴잉글랜드)을 자국 땅으로 선언하였다. 이것이 케이프 코드의 유래이다.


케이프 코드의 너셋(Nauset) 등대를 찾아서

지도에서 보면 채탐에서 프로빈스타운까지는 지근거리같아 보였는데 양 옆의 사구를 바라보며 한 시간여를 달려야 했다. 과연 미국은 큰 나라였다.


가는 도중 케이프 코드의 유명한 너셋 등대(Nauset Light)를 구경하기로 했다. 너셋은 프로빈스타운에 살았던 원주민 인디언 족의 이름이다.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가 프로빈스타운만에 도착하였고 식량과 물을 구하기 위해 탐사대를 조직해 내륙으로 들어갈 때 처음 만난 원주민들이 바로 너셋 족이었다. 배가 고팠던 순례자들은 원주민의 옥수수를 훔쳤고 이에 너셋 족은 활을 쏘며 이방인들을 쫒아내려고 했다. 말하자면 순례자들이 처음 만나 첫 교전을 치른 인디언 원주민이 너셋 족이었다. 이들은 유럽인과의 접촉 후 전염병이 퍼져 거의 절멸하고 다른 부족(왐파고아그(Wampagoag)족 연맹)에 흡수된 채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들은 사라지고 그 이름만 등대이름으로 남은 셈이다.


해변의 모래 길을 따라 걸어가자 붉고 흰 칠을 한 등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멀리서도 잘 보이게 하기 위하여 빨간색과 흰색으로 칠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너셋 등대의 상징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벽돌 라이닝이 있는 주철로 만들어진 이 등대는 우리나라 바닷가에 서있는 날씬하고 외로워 보이는 등대의 모습과는 달리 뚱뚱하고 튼튼하게 보였다. 실용적인 미국식 등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감자칩 제조회사인 ‘Cape Cod 사’의 봉지 전면에 이미지화되어 더욱 유명하다. ‘Cape Cod 사’는 감자를 Kettle(압력솥)에서 튀겨 내어 특유의 바삭함과 풍미를 내게한 것으로 제법 유명하다고 한다. 딸이 특별히 ‘Cape Cod 사’의 감자칩을 사 가지고 와서 많은 미국인들이 하듯이 이 과자 봉지를 넣어 사진을 찍었다.


너셋 등대와 케이프, 코드 감자칩


지난 세월 동안 이 등대는 케이프 코드의 위험한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는 선원들에게 구세주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조난 사고를 막아주는 등대의 역할이 고맙기도 하지만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류의 도전정신이 새로이 마음에 새겨졌다.


프로빈스타운의 청교도 정착지를 찾아서

너셋 등대를 출발한 우리는 필그림 파더스가 처음 닻을 내린 프로빈스타운으로 갔다.

케이프 코드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프로빈스타운까지 이어지는 약 64km(40마일)의 대서양쪽 해안은 케이프 코드 국립 해안(Cape Cod National Seashore)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해안이었다.


이 사구의 끝에 프로빈스타운이 있었다. 지금의 프로빈스타운은 해양레저생활을 즐기려는 도시사람들의 주요 휴양지로 이름났지만 이곳은 필그림 파더스의 최초의 도착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었다. 19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항을 출발했던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는 청교도들이 신대륙에서 최초로 도착한 곳이 바로 케이프 코드의 끝자락에 위치한 프로빈스타운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훨씬 아래쪽에 위치한 버지니아주에 건설된 영국 식민지인 죠지타운을 찾아갈 예정이었으나 배가 폭풍을 맞아 북쪽인 이곳에 도착하고 말았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계절이 이미 겨울로 들어섰고 항해길에 지친 그들은 일단 그곳에서 정착지를 개척해 보고자 하였다. 이들이 프로빈스타운에 머물렀던 기간은 5주간이었다.


프로빈스타운은 지금보아도 모래언덕과 염습지의 척박한 땅이다. 그러니 이민자들이 정착하여 새 삶을 가꾸기에는 어려움이 컸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원주민 인디언 마을에서 옥수수를 훔치기도 하면서 원주민들과 첫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더 나은 땅을 찾기 위해 주변을 정찰하던 그들은 한 달 뒤 건너편의 플리머스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었다. 그들이 떠나온 영국의 플리머스항구를 생각하여 신 정착지를 뉴플리머스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었다.


프로빈스타운에는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이민자들이 첫발을 내디딘 것을 기념하는 필그림 모뉴멘트가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모뉴멘트는 윌라드 T. 시어즈(Willard Thomas Sears)가 이탈리아의 시에나에 있는 토레 델 만지아(Torre Del Mangia)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하여 건축하였다고 한다(1910년). 시에나의 토레 델 만지아는 중세 도시 국가의 자치와 시민정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시어즈는 순례자들의 자기 결정, 민주적 공동체 건설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슷한 상징성을 가진 토레 델 만지아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케이프 코드의 필그림 기념비(왼쪽)와 시에나의 Torre Del Mangia(오른쪽)


우리는 필그림 파더스가 최초로 발을 디딘 땅임을 기념하여 바닷가에 세워진 기념 표지석에 도착했다. 작은 표지석에는 필그림들이 1620년 11월 11일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곳이라고 적혀있었다. 바닥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 땅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표지석이 서 있는 앞으로 펼쳐져 있는 검푸른 바다를 감격적으로 바라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푸른 바다와 늪과 모래언덕이 이어져 있었다. 지금의 화려한 레저 시설을 빼고 보면 참으로 황량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바닷속으로 길게 석축이 연결되어 있어 한참을 바닷속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저 깊은 바다에는 자주 고래가 출몰하여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고 한다.


우리도 석축 길을 걸었다. 대서양의 바람이 거세게 느껴졌다. 케이프 코드 자체가 바닷바람에 밀려온 모래로 만들어진 곶이다.


청교도들이 처음 미국에 도착한 지점에 세워진 기념 표지석(왼쪽)과 바다


그래서 내일은 그들이 옮겨간 뉴플리머스로 떠나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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