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여행
플리머스항은 케이프 코드의 프로빈스타운에서 케이프 코드만 건너편에 있다. 배를 타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자동차로 가니 한 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플리머스 항 앞의 바다는 내해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고요하고 안온하게 보였다. 바닷가에는 큰 참나무들이 마음껏 자라고 있었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었으며 바다에는 작은 배들이 여럿 떠 있어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곳은 현재 필그림기념국가공원(Pilgrim Memorial State Park)으로 지정되어 있다.
첫눈에 보기에도 케이프 코드의 프로빈스타운보다는 이민자들이 뿌리내려 살기에 훨씬 나은 장소처럼 보였다.
눈앞의 바다에 유니언 잭과 성조기를 단 배 한 척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배가 메이플라워호인 모양이었다. 물론 오리지널의 배는 아니고 재현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메이플라워호를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이 배는 1957년 영국이 미국에 선물한 배라고 하는데 복원 수리비만 1천120만 달러(약 134억 원)가 들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배 내부 모습도 볼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었다(물론 돈을 내야 한다).
사위와 딸은 미국 시민이면서도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지점에 도착한 데 대한 감격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학교에서 너무 많이 들어 신선미가 없는 건지, 아니면 현재의 삶을 살기에도 버거워 도무지 과거의 이야기에는 끌리지 않는지도 몰랐다.
남편과 나만 입장권을 끊어 메이플라워 호에 들어갔다. 입구부터 필그림들이 여기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그림과 패널들이 걸려있었다. 남편은 저만치 앞서 가고 나만 문자중독에 걸리기라도 한 듯 온갖 설명에 눈길을 주었다.
플리머스에는 메이플라워호 뿐만 아니라 필그림 이민자들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두 군데 더 있다. Plimouth Patuxet Musium과 Pilgrim Hall Musium이 그것이다. 나는 심드렁해하는 딸내외를 이끌고 도리없이 나를 따라나서는 남편을 모시고 꿋꿋이 박물관들을 돌았다. 입장료도 약간찮았다. 그러면서 부자나라인 미국이 방문객들의 주머니를 털 기회를 열심히 노리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약간 야속한 생각도 들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 땅에 도착한 사람들을 미국인들은 필그림 파더스라고 부르며 국부로 존경하고 있다. 미국 남부의 버지니아에는 죠지타운이라는 식민지가 1607년부터 만들어져 이들보다 먼저 번성하고 있었는데도 미국인들은 왜 플리머스에 도착한 이민자들을 더 존경하여 그들을 국부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일까?
메이플라워호에 올라 과거 이 땅에 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았다. 이 이야기는 메이플라워호뿐만 아니라 Plimouth Patuxet Musiums과 Pilgrim Hall Musium에서도 비슷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이들을 엮어서 그들의 삶을 조명해 보았다.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청교도들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올 17세기 당시 신대륙의 매사추세츠 동쪽에는 원주민 왐파고아그(Wampagoag) 족 70여 개 집단, 약 10만 명 가까이가 흩어져 살고 있었고 유럽인들은 벌써 1세기 전부터 그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1620년 9월 6일,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을 향하여 영국의 플리머스 항을 출발하였을 때 이 배에는 종교의 자유를 갈구하는 신교 신자들이 타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들을 ‘분리주의자(Separatists)’라고 불렀다. 이들이 영국을 떠나 신천지를 찾은 데에는 당시 유럽 사회를 갈라놓은 극심한 종교전쟁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영국은 1531년,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을 선언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였고 점차 국교를 강화해 나갔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떠날 당시 영국 왕은 제임스 1세였다. 제임스 1세는 국교와 다른 종교, 특히 청교도와 개신교 분리주의자들의 활동을 불법으로 선언하였기 때문에 영국에서의 그들의 삶은 위험해졌다.
이들은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네덜란드로 몰래 도망쳐야 했다. 처음에는 암스테르담에 살던 그들은 라이덴으로 이주해 갔다. 그러나 이민자로서의 그들의 삶은 네덜란드에서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경제적 곤궁은 해결되지 않았다. 자녀들이 네덜란드의 타락한 자본주의에 익숙해지는 것도 걱정스러웠다.
분리주의자들은 10년간의 라이덴 생활을 끝내고 신대륙 이주를 결심하였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그들은 1619년 6월, 런던 버지니아 회사(왕으로부터 위임받은 식민지 개척 회사)로부터 버지니아의 허드슨 강 하구에 정착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토지권리증서를 얻었다. 이후 청교도 실업 집단인 joint-stock company(JSC, 주식회사)를 통해 이민을 위한 자금을 빌렸다. 그때 70명의 영국 투자가들이 이 벤처를 지원했다. 투자가들 중에는 청교도들도 있었지만 단순 투자가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식민지로 가는 비용을 제공하고 그 대신 식민지에서 나오는 부로 재산을 증식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대서양을 건널 배로는 이민자들을 실어 갈 상선인 메이플라워(Mayflower)호와 그들이 식민지에서 쓸 낚싯배인 스피드웰(speedwell)호가 선택되었다. 두 배 모두 여객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승객들은 좁은 선실을 감수하고 머나먼 항해에 나서야 했다. 새로운 식민지 정착에 필요한 물품들(식량과 도구들 옷, 신발, 씨앗, 원주민과 교역할 물품들 등)을 잔뜩 실었으므로 선실은 더욱 비좁았다.
총인원 120명의 승객들은 메이플라워호에 90명, 스피드웰호에 30명이 나눠 타고 8월 15일 드디어 영국을 떠났다. 그러나 도중, 스피드웰 호가 누수 고장을 일으키자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9월 6일, 메이플라워호만 신대륙으로 출항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명이 출항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지원자는 102명으로 줄어들었다.
102명의 여행자의 절반은 본국에서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라이덴으로 피신했던 영국 분리주의자들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배의 승무원들과 청교도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이방인 중에는 1609년 제임스타운에 가는 도중 버뮤다에서 조난을 당한 바 있는 스태판 홉킨스(Stephan Hopkins)라는 사람도 있었고, 뉴잉글랜드로 항해한 적이 있어 그 지역에 대한 지식이 있는 Robert Coppin 같은 사람도 있어 항해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윌리암 브레드포드(William Bradford) 등 학식과 지도력이 뛰어난 청교도 핵심 구성원들이 있었기에 선상난동 등의 불미스러운 일 없이 66일의 항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윌리암 브레드포드는 후일 플리머스의 영국인 식민지의 지사 역할을 맡았었는데, 그가 쓴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 대해, Of Plymouth Plantation>라는 책으로 인해 당시의 모습이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메이플라워호는 태풍 때문에 항로를 크게 벗어나 당초 영국 왕실이 칙허한 땅인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도착하지 못하고 훨씬 북쪽인 케이프 코드에 도착하고 말았다. 제임스타운으로의 항해를 계속할지 논의가 분분했으나 2개월에 걸친 긴 여정과 추운 겨울이 닥쳐왔기 때문에 프로빈스타운에 상륙하자는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이렇게 되자 함께 승선한 "이방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임스타운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상륙을 꺼렸다.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이 땅에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고 민주 정치체제를 수립하기로 하는 서약서를 썼다. 이것이 저 유명한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ntext)”이었다. 102명의 승객 중 어린이와 여자를 제외한 전원인 41명이 이 서약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에 서명한 우리는 대영제국, 프랑스 및 북아일랜드의 신, 국왕, 신앙의 수호자, 등등의 은총을 통해, 숭배하는 군주인 국왕 제임스 1세(잉글랜드 왕) 제임스의 충실한 신민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및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버지니아 북부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항해를 계획했고, 개척지에서 질서와 유지, 위의 목적의 촉진을 위해서 하나님과 서로의 앞에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체결하며, 우리 스스로 민간 정치체제를 결성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을 제정하여 우리 식민지의 총체적인 이익을 위해 식민지의 사정에 가장 잘 맞다고 생각되는 정당하고, 평등한 법률, 조례, 법,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우리 모두 당연히 복종과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이곳 케이프 코드에서 우리의 이름을 서명한 바와 같다.
제임스 영국 국왕이 통치하며, 프랑스, 아일랜드 11년째, 그리고 스코틀랜드 54년째 통치년, 서기 1620년 11월 11일
이것의 중요 의미는 개척자들이 계약을 체결하여 스스로 자주적 식민정부를 수립하고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할 것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들은 몰랐지만 이러한 자율적인 체계구축과 복종을 명세하는 주민들의 동의는 앞으로 미국에 새로이 개설되는 식민지들의 모범이 되었고 후일 미국 독립과 헌법정신으로 이어지는 정신적이 지주역할을 하였다. 그만큼 메이플라워 서약은 미국 건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 후 이민자들은 선발대를 보내 새 정착지를 모색하였고 플리머스가 여러모로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곳에는 물이 풍부했고 평온한 항구가 있었으며 인디언들이 버려두고 간 농지도 있었다. 언덕에 정착촌을 설치하기에도 적합할 것처럼 보였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그들은 바닷가 언덕위에 그들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난관의 연속이었다. 가져간 식량과 생필품은 진즉 바닥이 났다. 그 겨울에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기아로 죽었다. 메이플라워호가 다시 영국으로 떠난 이듬해 4월에는 일행 가운데 거의 절반인 54명만 살아남았고, 그나마도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런데 1621년 3월 16일, 이들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키가 크고 잘생긴 한 인디언 청년이 그들 텐트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짧은 영어로 “환영합니다. 친구들, 누구 맥주 없소?”라고 하여 이민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사모셋이라는 인디언이었다. 그는 그물로 대구를 잡는 법을 배우려고 북아메리카 해안에 온 영국 어부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사모셋은 자기 친구 티스콴툼(Tisquantum)은 자기보다 영어를 훨씬 잘한다고 했다.
이후 사모셋과 티스콴툼 등은 영국 정착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어디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지도 알려주었다. 이민자들은 티스콴툼의 발음이 어려워 스콴토(Squanto)라고 불렀다.
스콴토의 도움을 받아 이민자들은 원주민 부족의 마사소이트 추장과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들은 원주민과의 교역을 통해 영국을 떠날 때 빌린 자금도 갚아나갔다.
그러면 스콴토는 어떻게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었을까? 참 기구한 그의 인생이 이민자들을 살리는 빛이 되었으니 역사는 우연의 구슬에 꿴 목걸이와 같다.
스콴토는 매사추세츠 동부 연안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인 왐파고아그(Wampagoag)족의 일원이었다. 스콴토가 영어를 배우게 된 것은 순전히 그 지역의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다.
존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모험심이 있었던 그는 1614년 미국 동부해안으로 탐험을 떠났다가 대규모로 대구를 잡아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Patuxet(오늘날의 프리머스)와 Nauset(오늘날의 케이프 코드)에서 원주민 27명을 꾀어 어창에 빠뜨린 뒤 스페인으로 끌고가 노예로 팔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스콴토는 영국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5년을 지내며 영어와 영국 습성을 익힌 후 고향인 Patuxet로 돌아올 수 있었다. 1619년 그가 마침내 고향의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부족이 병으로 쓰러져 친구와 가족 대부분이 죽은 뒤였다.
참고로 매사추세츠 동부 해안에 유럽 어선들이 나타나면서 원주민들이 이름 모를 역병에 걸려 메이플라워 호가 도착할 즈음에는 뉴잉글랜드 해안의 원주민 인디언들의 70%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민자들이 발견한 텅 빈 농지도 원주민들이 역병으로 죽어 버려진 땅이었다.
그들이 플리머스에 도착한 일 년 뒤, 이민자들은 첫 수확을 하였다. 그들은 감격적인 추수를 하고 인디언들과 함께 감사의 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에는 살아남은 필그림 51명과 마사소이트의 무리 90명과 함께했다. 축제는 3일간 계속되었고, 많은 종류의 물새, 야생 칠면조와 생선과 인디언이 가져온 다섯 마리의 사슴이 축제에 사용되었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미국의 대표적인 축제가 되었다.
이들의 생존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스콴토는 1622년 역병으로 죽었다.
프리머스 식민지로 계속 청교도 이민자둘이 들어왔다. 이듭해인 1621년 35명이, 1622년에는 다시 67명이 도착했다.
영국에서 프로테스탄트와 카토릭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오는 영국 이민자 수가 늘어났다. 필그림스가 상륙한 지 20년 만에 플리머스 식민지에는 8개의 마을들이 생겨났고, 대략 2,500명의 주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는 버지니아 식민지인 제임스타운과 함께 북미 지역에서 설립된 초기의 잉글랜드 식민지가 되었으며 그 규모도 점점 커졌다. 그 후 자치령은 플리머스 식민지 외에, 로드 아일랜드, 매사추세츠 만, 코네티컷 및 뉴햄프셔 식민지로 퍼져나갔다. 1688년에는 뉴욕, 웨스트 저지 및 이스트 저지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플리머스 식민지는 원래 설립 때부터 정식 임차권을 얻지 못한 채 시작되었다. 영국 국왕이 된 윌리엄과 메리는 플리머스 식민지를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 합병시킨다는 새로운 허가서를 내렸다(1691년). 그리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는 공식적으로 1692년 5월 14일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여기까지 프리머스 식민지의 생성과 소멸을 살펴보았다. 식민지 이주민들이 숱하게 죽어 플리머스 언덕에 묻혔고 나중에 원주민들과 벌인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원주민들이 쫓겨나고 학살당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1620년 대서양을 건너와 험난한 과정을 거쳐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을 존경하여 그들을 필그림 파더스로 부른다. 그들이 종교적 열정으로 이루고자 했던 순수한 나라의 건설과 역경을 마다하지 않았던 개척정신과 원주민들과 이루었던 화합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기 때문인듯하다. 그리고 메이플라워호에서 맺었던 자치정부에 대한 옹호가 오늘날 미국정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듯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들의 개척정신을 최고로 쳐주고 싶다. 그 숱한 어려움을 겪고서도 이듬해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이민자의 누구도 영국으로 되돌아가는 대열에 서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인간의 위대함에 다시 한번 감동하게 되는 순간이다.
필그림기념국가공원(Pilgrim Memorial State Park)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프리머스의 심벌이기도 한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이다. 필그림들이 프리머스에 도착하고 처음 밟은 돌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 돌에는 필그림들의 도착을 기념하여 1620이라는 글자를 새겨두었다.
플리머스 록을 이곳에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패널을 읽으면서 미국인들이 자기들의 역사를 얼마나 소중히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다음은 매사추세츠주 의사당에 걸려있는 신성한 대구 모형을 찾아 나선 이야기를 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