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여행
플리머스를 거쳐 우리는 ‘성스러운 대구(Sacred Cod)’를 보기 위하여 보스턴(Boston)으로 갔다. 이른바 ‘성스러운 대구(Sacred Cod)’라고 불리는 대구 목각이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에 걸려있다고 해서였다. 또한 플리머스 식민지가 매사추세츠 만(Massachusette Bay) 식민지로 통합된 이유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플리머스에서 보스턴까지는 자동차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우리는 보스턴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 국립공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비컨 힐(Beacon Hill)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보스턴 커먼은 1634년에 조성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공원이라고 했다. 세상에! 1634년이라니! 보스턴이야말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임을 이 공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보스턴 커먼에서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Massatussets State House)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느릅나무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 너머로 의사당의 유명한 황금빛 돔이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 이곳에 큰 느릅나무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스턴을 상징하는 붉은 벽돌과 전면부의 그리스 코린토식 기둥이 중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의사당은 1798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의 가장 큰 자랑은 23캐럿의 금박을 입혔다는 돔이다. 황금빛 돔은 멀리서도 보스턴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비건 힐을 올라가면서 보니 그리스식 기둥을 한 건물들이 꽤 눈에 띄었다. 미국 동부지역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미국처럼 건축물에 그리스 양식의 기둥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나라는 없는 것 같
다. 미국 국가를 세울 때 그들이 지향했던 것이 그리스의 민주정신이어서 였을까 아니면 신생국에는 없는 역사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내내 들었다.
주말이어서 인지 의회건물은 조용하였다.
일층 입구의 홀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린 듯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입구에 6.25 전쟁 관련 패널들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6.25 관련 행사가 열린듯했다.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에서 한국인들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반가웠다.
안내에 길을 물어 2층의 주 하원 회의실로 올라갔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과연 천정에 대구가 매달려 있었다. 아! 드디어 찾았다. 보스턴 사람들이 ‘신성한 대구(Sacred Cod)’라고 신성시하는 그 대구 목각이다.
150cm 길이의 나무로 만든 대구 모형이다.
이 목제 조각품은 1784년에 조각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의 목제 조각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금도금된 화려한 모습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1747년의 청사 화재로 불타버렸고 두 번째 제작된 신성 대구는 미국 독립 혁명 초반에 영국군이 보스턴을 점령하는 난리통에 사라져 버렸으며, 현재의 3대 신성 대구는 1784년 다시 제작되어 주정부 청사에 매달렸다고 한다. 이후 매사추세츠 주정부 청사가 이전할 때마다 이 신성 대구도 함께 새 청사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의사당에 들어갔을 때 중국인 관광객 몇 명이 이 대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구임에 틀림없다.
나는 천장에 매달린 대구를 바라보면서 구석기인들이 동굴 안에 그린 동물 그림들이 회상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요 식량이 되는 동물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염원하며 동굴 벽에다 커다란 들소와 사슴 등의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뉴잉글랜드의 번영을 가져다준 대구에 감사하며 저 목각 대구를 항상 지켜왔다고 생각하니 대구가 얼마나 사무치게 그들에게 고마웠겠는가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처음 플리머스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종교적 열정에는 차 있었겠지만, 생활력은 별로 볼품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농업과 어업을 자신들의 생활 근거로 삼으려고 했던 것 같기는 하나 그들이 유럽에서 가지고 온 곡물 씨앗은 신대륙에는 맞지 않았고 심지어 물고기 잡는 법도 몰랐던 것 같았다.
다만 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할 때 그들은 존 스미스가 대구를 잡아 거부가 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존 스미스가 1614년 노스버지니아를 항해 항해를 떠나 엄청난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된 사연이 영국에서 이미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물고기에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영국 청교도 이민자단체는 케이프 코드가 있는 노스버지니아를 무상으로 불하해 줄 것은 영국 왕실에 요청했다. 영국 왕실이 그들에게 땅을 하사하면 어떤 활동에 종사해 이득을 얻을 수 있겠냐고 묻자 그들은 고기잡이라고 대답했다. 이로 보아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미 대구잡이가 그들의 생존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준비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겨우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연안에서 낚시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장비도 어로 기술도 없었다.
이민자들이 프리머스에 도착해 굶어 죽어 가고 있을 때 바다에는 대구가 우글거리고 있었고 바닷가 해안에는 대합조개나 비늘 백합, 다랑 조개, 홍합 등이 지천이었고 커다란 바닷가재들이 철걱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로 그해 열 척의 영국 배가 뉴잉글랜드 바다에서 대구를 잡고 있었다. 그다음 해에는 37척의 배가 왔고 1624년에는 50척의 영국 어선이 그 앞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수산물의 천국에 있었으나 잡을 줄도 먹을 줄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환경에 적응하였고 서서히 어부가 되어갔다. 이민자들은 자기들에게 투자한 청교도 모험 상인들에게 도움을 청해 조언을 구하였고 장비를 사들였다.
그리고 1623년 처음으로 글로스터에 어업기지를 건설하였다. 플리머스보다 대구잡이가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623년이라면 그들이 플리머스에 도착한 지 3년 만이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자마자 곧바로 고기잡이에 나선 증거로 보인다.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재차 글로스터, 세일럼 등에 어업기지를 건설해 나갔다. 고스놀드가 언급한 것처럼 이 지역 바다에는 물 반 고기반이었다.
이 지역에는 대구뿐만 아니라 청어, 연어 등 물고기 떼가 많았다. 그 이유는 이 인근에서 미동부 해안을 따라 남쪽에서 올라온 따뜻한 물(멕시코 만류)과 그린란드를 거쳐 온 차가운 물(래브라도 한류)이 만나 그랜드 뱅커스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대구는 심해어이기 때문에 바다 깊은 곳에 산다. 그래서 살색이 희고 담백한 맛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산란기가 되면 해변으로 올라와 알을 낳았다. 대구는 한겨울에는 남부 잉글랜드의 해안에서 알을 낳고 봄이 가까워지면 메인주 앞바다에서 알을 낳고 여름에는 뉴펀드랜드에서 알을 낳았다.
북부의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샤에서도 대구가 많이 잡혔지만 남쪽에 위치한 뉴잉글랜드가 대구잡이에 보다 유리했다. 그들은 겨울철에는 연안에서 고기를 잡고 여름에는 근해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훌륭한 경작지도 있어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민자들이 플리머스에 도착한 20년 뒤인 1640년,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세계 시장에 30만 마리의 대구를 수출했다. 세일럼이 어업기지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자 후방 기지인 보스턴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정착민들은 대구시장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매사추세추를 향해 더 멀리 이동했다. 대구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를 확산시켜 준 것이었다.
뉴잉글랜드에 자금과 사람이 모이자 북쪽의 뉴펀들랜드산 대구를 보스턴에 팔기 시작하였다. 보스턴은 이 대구를 빌바오에 팔았다. 중세 유럽에 대구를 대규모로 공급하던 스페인 북부 빌바오는 이제 유럽의 중요 대구 전진기지가 되었다.
대구는 중세 이후 유럽의 중요 단백질 자원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가톨릭의 엄격한 규율 속에 메여있던 중세시대에 교회법은 곧 법률이었다. 예수가 돌아가신 금요일은 금육제를 엄격히 지켜야 했다. 교회는 육고기대신 생선의 섭취는 허용했으므로 생선의 수요가 엄청 높았다.
당시 주요 생선 급원은 북해에서 대규모로 잡히는 청어였다. 그런데 바스크인들이 유럽 시장에 대구를 대규모로 공급하면서 대구가 주요한 어종으로 급부상하였다. 대구는 흰살생선이라 비린내가 많이 나지 않았고 담백하여 어떤 요리에도 잘 어울렸고 더구나 크기가 커서 한 마리만 잡아도 수율이 높았다. 영국인들은 소금절임하여 말린 대구를 이용하여 Fish&Chip를 만들어 영연방에 유행시켰다.
이제 유럽의 대구 공급원은 뉴잉글랜드의 어민들이었다. 신대륙의 대구 수출선들은 스페인산 소금(스페인은 갯벌과 햇볕이 좋았으므로 유명 소금 산지들이 많았다)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소금은 대구를 건조하는 데 꼭 필요하였다.
그들은 대구의 주요 수출국을 하나 더 확보하였으니 서인도제도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설탕이 새로운 부의 작물로 떠올랐다.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가 잘 자랐으므로 유럽인들이 서인도제도에 몰려와 설탕 사업에 열을 올렸다. 사탕수수의 생산에는 대량의 인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마구 잡아와 설탕 플랜테이션에 투입하였다. 농장주들은 한 치의 땅이라도 사탕수수를 심어야 했으므로 노예들을 위한 농토를 남겨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노예들에게 계속 노동을 짜내려고 하면 소금과 단백질이 필요했다. 소금 절임한 값싼 대구가 이들의 요구에 딱 맞았다. 그래서 뉴잉글랜드의 식민지인들은 품질이 좋은 대구는 빌바오로 팔고 조악한 품질의 대구는 서인도제도로 가져가서 팔았다. 수요는 무지무지하였다.
여기서도 수출선들은 빈 배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구를 팔고 거기서 생산되는 소금과 설탕, 몰라스 등을 싣고 돌아왔다. 1710년대까지 1년에 무려 3백 척 이상의 배가 서인도제도를 향해 보스턴을 떠났다. 이중 당밀이 뉴잉글랜드에 효자 역할을 하였다. 당밀(molass)은 사탕수수에서 짠 즙으로 설탕을 만들고 난 부산물이었다. 식민지인들은 이 당밀을 이용해 럼주를 만들었다. 럼주가 소비되면서 식민지들이 부자가 되어갔다.
이렇게 삼각무역을 하면서 이민자 상인들은 더 돈이 되는 사업을 발견하였다. 노예산업이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아프리카 노예를 사서 바르바도스 제도에 팔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청교도의 이상주의를 내건 사람들이 가장 비인간적인 사업인 노예시장에 뛰어든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타락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 같았다. 돈이 되면 무엇이든지 하는.
뉴잉글랜드의 어민들이 부자가 되어갔고 보스턴은 국제적인 상업중심지로 떠올랐다. 보스턴 사람들은 대구자금을 바탕으로 보스턴에 대학을 지었다. 후일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이 될 하버드대학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구 어업 덕분에 부유하게 된 어부들은 대구를 공공연히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구를 공식적인 문장에 사용하였고 1776년~1778년 사이에 발행된 아메리카의 첫 주화에도 대구 문양이 들어갔다. 대구 귀족들은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황금을 입힌 대구로 집안을 장식하였다.
이 당시 신문에는 이들을 ‘대구 귀족(codfish aristocracy)’으로 비아냥대는 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대구는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이 대구가 신성한 대구가 된 것이었다.
“Cod Forever!”
이 대구는 보스턴의 오래된 식당 입구에도 새겨져 있었다. ‘Union Oyster House’라는 식당이었다.
이 식당은 1826년 문을 연 후 지금까지 운영 중인,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임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식당 이층의 창가에 겨우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범선과 그 옛날의 보스턴의 저명인사들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박물관처럼 보존 중인 Colonial Room에는 그 옛날 보스턴을 만든 사람들 이야기가 한가득 그림으로 걸려 있었다.
우리는 처음 이곳에 도착한 이민자들이 먹기를 거부한 조개 튀김과 조개차우더, 바닷가재 요리를 즐거이 먹었다. 허기진 여행자의 입에는 그 모든 것이 맛있었다. 대구 요리는 메뉴에 없어 아쉬웠다.
대구를 잡아 동부 식민지 세력의 확산에 기여하고 미국 독립까지 이끌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흥미롭기 짝이 없다. 다음은 보스턴의 역사 trail에 나설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