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여행
보스턴 사람들의 어깨는 평균 미국인들의 그것보다 한치쯤 올라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보스턴 사람들의 자부심이 높다는 말이다. 보스턴 인들이 그토록 자부심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을 걸으며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하였다.
매사추세츠 만에서 대구가 많이 잡히자 청교도들의 합동 회사는 1628년, 매사추세츠 만 지역에 정착자들의 단체를 더 보냈다. 세일럼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1630년 영국의 변호사 존 윈스롭은 약 1,000명의 청교도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세일럼에 엄격한 청교도 사회를 건설하면서 마녀사냥이라는 비극이 탄생하였고 이곳을 배경으로 너세니얼 호손은 유명한 <주홍글씨>를 썼다.
1630년 후반에 그들은 세일럼을 떠나 오늘날의 보스턴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렇게 하여 매사추세츠만 식민지가 번성하게 되었다. 매사추세츠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 매사추세츠 족(Massachusett tribe)에서 왔다고 한다. 인디언의 말로 큰(mass) 언덕(chussett)이라는 뜻이었다. 서울의 대치동(大峙洞)과 같은 뜻이다.
이들이 대구잡이를 통해 부를 축적할 때 내부적으로는 ‘대구 귀족(codfish aristocracy)’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사실 이들을 보면서 더욱 배가 아픈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인들이었다.
처음 북미 식민지가 개척될 때 영국은 북미식민지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스페인이 차지한 남미처럼 금은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도 아니었고 노예로 부릴 수 있는 인력이 넘치는 곳도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허덕거리는 이민자들만이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는 못난 땅이 뉴잉글랜드 식민지였다. 영국인들에게는 캐시 카우(cash cow)인 인도라는 식민지가 있었다.
그런데 뉴잉글랜드 인들이 삼각무역을 통해 부자가 되어 가자 영국이 질투하기 시작하였다. 중상정책을 내세운 영국 의회는 1651년부터 1673년까지 아홉 차례나 <항해법>을 개정하며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경제를 규제하였다. <항해법>은 잉글랜드의 무역을 잉글랜드의 배로 한정시킨다는 법이었다. 물론 식민지 배도 식민지로 물건을 옮길 수 있었으나 담배와 설탕, 직물은 오직 잉글랜드로만 팔 수 있게 하였고 식민지로 향하는 모든 상품은 잉글랜드를 거치도록 하였고 수입 관세를 내도록 강제하였다.
식민지인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부를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식민지와 영국 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식민지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733년에는 <당밀법>을 제정하여 영국령이 아닌 식민지에서 수입하는 당밀에 세금을 부과하여 영국령 서인도 제도산 당밀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미 서인도산 당밀을 수입하여 럼주를 만들어 팔면서 재산을 축적한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불 보듯 뻔했다.
영국의 중상주의에 대해 식민지인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와 프랑스, 스페인 등이 반발하였다. 영국은 일찌감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눌렀고, 네덜란드와는 네 차례에 걸친 영란 전쟁을 통해 힘으로 제압한 뒤였다. 이어서 영국은 숙적관계인 프랑스와 7년 전쟁(1756~1763)을 치렀다. 이 7년 전쟁은 신대륙의 식민지로도 불똥이 튀었다. 프랜치-인디언 전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7년 전쟁)에 승리하면서 영국은 캐나다, 플로리다, 미시시피강 동안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토 등을 새로운 식민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전비의 지출로 인해 국고가 텅 비게 된 것이 문제였다. 영국은 이러한 재정 지출을 식민지에 전가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영국은 7년 전쟁이 끝난 1764년, <설탕법>을 제정하여 타국 식민지로부터 수입하는 설탕, 포도주, 커피 등에 대한 세금과세를 강화했다. 이어서 1765년에는 <인지세>를 부과하였다.
이에 대해 식민지인들은 영국 상품 불매운동으로 세금 반대 투쟁을 벌였다. 식민지인들의 반대가 심각하게 되자 영국 의회는 <인지세>를 폐지했지만 1767년에 새로운 법안인 <타운센트법>을 제정하여 식민지인들이 수입하는 차(茶)와 유리, 종이, 납, 페인트 등에 과세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는 부도위기에 빠진 동인도회사를 지원하기 위해 1773년 식민지에서 <차세>를 과세했다. 동인도회사에게는 관세를 면제하고 식민지에서 독점적으로 차를 팔 수 있도록 하자 기존 식민지 상인들은 동인도회사가 파는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차를 팔 수밖에 없어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보스턴 티 사건을 촉발하였다.
영국의 <차법>에 반발하여 보스턴 사람들이 영국 동인도회사 상선에 올라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여 무려 20억 원에 해당하는 홍차를 보스턴 만에 버려버렸다. 이 사건으로 영국이 격앙하였고 보스턴 인들도 격앙하였다. 양쪽의 긴장이 높아지면 결국 전쟁이 터진다.
영국 정부는 이 손해를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한다는 결정을 하고 영국 정규군을 파견하였는데, 이 군인들이 사소한 다툼으로 발포하는 바람에 노동자 5명이 죽고 6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다. 식민지인들은 이 사건을 ‘보스턴 학살 사건’이라고 부르며 분개하였고 이 사건이 미국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13개 식민지인들은 이에 반발했다. 1700년대에 들어 가자 미국 동부 13개 식민지에는 약 3백만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어 만만찮은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식민지 대표들이 참석하는 대륙회의를 열고 "대표자 없는 과세 없다"라는 원칙을 확인하였다(1774년). 이에 격분한 영국이 정규군을 파견하자 식민지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영국군에 맞서기로 하였다.
1776년에 개최된 제2차 대륙회의에서 뉴잉글랜드 13개 식민지의 대표들은 미국독립선언에 서명하고 새로운 국가인 아메리카 합중국(미국)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신생국 아메리카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완전 항복하는 1781년까지 계속되었다.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은 바로 이 과정에 관여한 보스턴의 여러 장소들을 지정하여 기념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보스턴 커먼에서 시작하여 USS 컨스티튜션호까지 16개의 장소를 지정하고 있다. 붉은 벽돌을 깔아놓은 길을 따라가면 독립전쟁과 관련된 여러 기념물과 오래된 건물들을 볼 수 있다. 보스턴 사람들의 자부심의 근원이 바로 이 프리덤 트레일에 있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딸 내외와 함께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에 나섰다.
프리덤 트레일은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에서 시작되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보스턴 커먼으로 갔다.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이 워낙 유명한 탓인지 방문자센터 앞에는 트레일에 나선 사람들과 식민시대의 복장을 한 가이드들로 북적였다.
한쪽에는 책을 손에 든 젊은 학생들의 조각이 있어 학문의 도시 보스턴임을 상기시켰다.
프리덤 트레일은 미국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있다.
여기에는 1770년 보스턴 노동자들과 영국군 사이의 우발적이 다툼으로 영국군이 쏜 총에 맞아 노동자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다친 사건이 일어난 보스턴 학살 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진 광장도 있고 보스턴 최초의 공립학교 자리도 있으며, <엉클 톰즈 캐빈>, <주홍글씨> 등 많은 명작이 출판된 올드 코너 서점 자리도 있다. 게다가 독립전쟁에 나선 보스턴 명사들이 묻혀있는 여러 묘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독립운동을 이끌던 사람들이 모이던 올드 스미스 미팅 하우스나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 폴 리비어 하우스. 올드 노스 교회도 의미 있는 곳들이다.
프리덤 트레일에서 여섯 번째로 소개하는 곳은 보스턴 최초의 공립학교 자리이다. 1635년에 세워진 이 학교에는 독립선언서에 사인한 밴자민 프랭클린과 새무얼 애담스, 존 핸콕, 로버트 트리트 페인, 윌리엄 후퍼가 다녔다고 한다. 학교가 이전한 뒤에는 시청사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 앞에는 밴자민 프랭클린의 동상이 서 있다.
구 시청사 건물을 지나면 코너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상가 건물이 나타난다. 이곳은 처음에는 약국으로 사용되다가 1828년부터 서점으로 용도가 바뀌었다고 하는데 <엉클 톰즈 캐빈>, <주홍글씨>등 많은 명작들이 출판된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chipotle(치폴레)라는 멕시칸 음식점이 되어 있다.
보스턴 커먼의 바로 길 건너편에 보이는 교회가 파크 스트리트 교회(Park Street Church)이다. 1809년 올드 사우스 미팅 하우스에 모였던 멤버 26명에 의해 설립된 보수파 교회이다. 66m의 높은 흰색 첨탑이 인상적인 보스턴의 랜드마크 건물로서 1828년까지 미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영국과의 독립 전쟁 중에는 화약창고로 사용되었고 1829년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노예 반대 연설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올드 서점의 길 건너편에 올드 사우스 집회소(Old South Meeting House)가 있다. 이곳은 1773년 보스턴 티 사건을 계획했던 집회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Old State House)는 1713년 지어진 조지안 스타일의 건물로 황금빛 조각과 흰 첨탑을 가지고 있다. 독립혁명 이후 매사추세츠 주청사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 건물의 2층에서는 토론과 재판이 열리던 대의원실과 대회의실이 있었다. 사무엘 애담스는 이 회의실 발코니에서 보스턴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그 후 매년 독립기념일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페뉼 홀(Faneuil Hall)은 상인이었던 피터 페뉼이 1742년 보스턴시에 기증한 건물로서 지금은 퀸시마켓, 노스 마켓, 사우스 마켓과 함께 페뉼 홀 마켓 플레이스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 많은 집회와 토론이 이어져 ‘자유의 요람’으로 불린다. 영국이 부과한 세금에 대해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원칙을 공표한 곳이다. 건물 앞에 미국 독립운동의 영웅 사무엘 애담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프리덤 트레일 순회 중 올드 노스 교회의 관리인이었던 로버트 뉴먼과 폴 리비어라는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올드 노스 교회(Old North Church)는 1723년에 지어진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교회이다. 첨탑은 53미터 높이에 달해 전망에 유리했다. 로버트 뉴먼은 첨탑에서 영국군의 침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군이 육지로 오면 하나, 바다로 오면 두 개의 불을 밝히기로 약속하였다.
1775년 4월 18일 밤 영국군이 침공해 오자 그는 랜턴을 밝혔고 이를 본 폴 리비어가 밤새 말을 달려 식민지군의 민병대에 알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독립전쟁의 첫 전투였던 렉신턴-콩코드 전투에서 식민지군이 기적적으로 승리하였다.
올드 노스 교회 앞에는 폴 리비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올드 노스 교회도 독립혁명사의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고 리비어가 살았던 폴 리비어 하우스도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폴 리비어 하우스는 2층 목조건물인데 여러 번 주인이 바뀐 것을 리비어의 증손자가 매입해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고 한다. 내부에는 폴 리비어가 쓰던 가구,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가다 보니 보스턴 인들의 어깨가 으쓱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보스턴은 말 그대로 미국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저녁은 폴 리비어 하우스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먹었다. 이곳은 이탈리아 이민자가 많은 지역이라고 하였다.
넓은 식당 안에 테이블을 거의 맞닿게 붙여두었는데도 발 디딜 틈이 없을만치 만석이었다. 우리는 왁자지끌한 식당에서 저녁 만찬을 즐겼다. 그곳에는 유쾌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쳐 이방인인 우리까지 절로 흥겨웠다.
세금에 팁까지 식사비는 만만치 않았지만 보스턴의 자유함을 만끽하는데 지갑을 좀 열면 대수냐하는 뱃장이 생겼다. 그래서 맛있는 이탈리아 요리를 실컷 먹었다. 딸과 사위도 덩달아 비싼 와인을 주문해 마셨다. 내일 주머니 사정을 걱정할지도 모르지만 오늘 즐거운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