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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Hunter Aug 18. 2024

고양이랑 개에 대한 진실

정신분석에서 쓰이는 언어학

1. 고양이랑 개에 대한 진실

문명 속에 사느라 너도 고생이 많다...

개나 고양이를 대하는 방식이 나랑 같은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우리 어머니 경우 개는 사람을 무는 동물이며 비싼 외출복에 털이나 묻히는 성가신 존재로 혐오 대상이다. 고양이도 그런 선상에서 인생에 쓸모없는 귀찮은 이미지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반대로 내 예전 여친은 고양이 눈을 무서워해 고양이 공포증에 시달렸다. 고양이가 무섭다는 사람을 살면서 직접 본 것은 처음인데 그 이유가 뱀 눈처럼 고양이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라고 했다. (정작 본인은 상어 눈이면서..-_-;)


그리고 나머지 여성들은 대부분 개나 고양이를 좋아했다. 그들에게 개나 고양이는 각자 유구한 역사랑 혈통을 가진 동물이라기보단 귀여운 인형이나 아기 대용으로 선호하는 이미지였다. 


굳이 정신분석을 공부지 않더라도 나는 개나 고양이가 가진 실재가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이랑은 다르다는 것쯤은 알았기에 같이 산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이토록 개를 좋아하지만 평생 내 개를 가지지 않는 것은 빠듯한 환경도 있지만 그들이 가진 욕구가 내 욕구랑 전혀 다를 것이라는 계산이 먼저 섰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쁜 고양이는 없다고 했던가? 나는 그 말 체가 너무나 웃긴다. 고양이는 사물인데 거기에 우리 인간이 판단하는 좋고 나쁘다는 수식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달아 버리다니... 뭐가 좋은 것이고 뭐가 나쁘다는 말인지, 사람마다 그 기준도 제각각 다르면서 마치 이것이 특정 공동체에서 합의되거나 새롭게 합의해야 할 논제처럼 다룬다. 


인간이 싫어하는 쥐를 잡기에 고양이는 선하다고 하겠지만 그놈이 쥐를 물어서 내 침대 위로 물고 올라오는 순간은 나쁜 짓이 된다. 고양이 입장에서는 같은 사냥을 해도 어떤 때는 칭찬이 나오고 어떤 상황에서는 호된 매질을 하는 인간을 향해 세상에 좋은 인간은 없다고 할 것이다. 


고양이는 작은 육식동물로 인간이랑 오래 같이 지내왔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 언어 세계, 상상계에서 그 녀석들을 선하다 악하다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악랄한 폭력이다. 이것이 비단 고양이에게뿐인가? 우리 언어는 너무나 부실해서 지금 인간이 겪는 대부분 문제를 양산해 낸다. 


2. 성선설 vs 성악설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려서 내가 보던 교과서에서는 성선설 성악설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인간은 태생이 착하냐 나쁘냐를 논하는 공론인데 결론은 모르겠다였다. 양쪽 입장을 대변하는 위대한 사상가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양쪽 모두 맞는 말처럼 들려서 교과서를 지은이도 누구 편을 들지 모르겠다는 고백으로, 지도 모르는 것을 국민 교과서에 넣는 용기 말고는 배울 점도 기억나는 것도 없는 시간 낭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문장은 단위가 맞지 않는 엉터리 질문이다. 문법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란 살아있는 생명체로 37도가량 유지가 되는 혈액이 흐르는 포유류인데 그런 동물을 애매한 도덕 개념인 착하다 나쁘다로 규정지으려고 하니 답이 나올 리가 있는가?


정신분석에서는 그가 가진 특이성을 자기 스스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외부인은 알 수도 없지만, 분석을 통해 그 특이성을 잠시 마주하게된다 해도 그 실재는 곧 변할 것이기에 누군가를 한 단어로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성선설을 논하는 것은 마치 전체 인류가 가진 70억개 증상을 한 단어로 규정하겠다는 말이랑 같겠다.


인간이 착하냐 나쁘냐를 묻는 질문은 사과가 착하냐 나쁘냐를 묻는 질문이랑 내겐 차이가 없다. 주어인 사과는 품종으로 식물이며 인간은 동물로 자연과학 영역에서 정한 명사인데 뒤에 수식하는 '착하다 나쁘다'는 사회 과학에서 만들어진 덕성으로 비교 단위가 다르기에 한 문장에서 측정할 수 없다. 대신 그 사람 키가 크다. 피부가 무슨 색이다. 이런 문장은 뒤에 형용어도 과학이니 단위가 맞는다. 그 교과서는 결국 학생들에게 자기 인생에서 풀지 못한 답을 구하는 외로운 절규였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정신분석을 진지하게 읽기를 권한다. 저자 선생, 


질문 자체가 틀렸는데 답이 있겠습니까?  


이제야 그분을 원망해서 무엇하는가? 이것도 우리 언어가 가진 문제 때문이다. 우리 언어에는 은유가 기본으로 깔려 있는데 문제는 그 대상이 어떤 것은 일대일 치환이 가능한 사물이고 어떤 것은 형체도 없고 정의 내리기도 힘든 사상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이렇게 구성된 단어들을 마구 섞어 쓰니 단위가 맞지 않고, 나아가 그런 문장이 반대로 우리 정신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저명한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라도 삶에서는 우리랑 같은 언어를 쓰는 신경증자이기에 "그 사람 참 차가워!"라는 말도 쓴다. 실제로 처음 악수한 그 손이 차갑거나 추운 환경에서 그를 만나게 되면 그 불쾌한 감정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도 쓰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차갑다'는 온도를 측정하는 단어를 성품을 묘사할때도 쓰는 우리 언어 구조 때문이다. 차갑다는 외부 환경이 그 사람 이미지를 차갑다는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이 논리는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도 쓰인다. 언어가 실재를 거꾸로 규정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흔한 사례이나 주위를 살펴보면 엄청난 돈을 쏟아 넣는 기업들 마켓팅이라는 작업은 이런 언어 맹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특정 상품을 소개할 때 언어나 이미지를 먼저 주입해서 실재 그 상품보다 나은, 제작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에게 착시를 일으킨다.


3. 아, 소쉬르!

페르디낭 드 소쉬르

소쉬르 형 언어학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자. 정신분석에서도 너무 자주 인용되는 이론이라 단 한 번도 언어학을 공부하지 않은 나도 이제는 술술 읊을 정도로 유명한 이론이다. 사과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기의)는 문명마다 같은데 이를 표시하는 문자나 발음(기표)은 다르다는 것으로 언어는 본질이 "개념을 자의로/임의로 청각 이미지랑 결합한다"는 말이다. 사과를 apple로 규정한 문화권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끼리 약속일뿐 apple이라는 단어에 그 실재랑 연결된 그 어떤 진실함도 없다. 듣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우리 인류는 이것을 소쉬르 형을 통해 최근에서야 알았기에 그전까지 수많은 고통 전쟁 시련을 겪어 왔다. 요한복음 1장을 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신학에서는 언어가 먼저 생기고 인간이 나중에 생겼다는 세계관을 가진 것 같다. 저기서 이야기하는 "말씀"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언어"랑 다르다면 유감이다. "말씀" 안에 또 다른 어떤 뜻이 있고 없고는 다음에 목사님에게 여쭤 보기로 하고 우선 여기서는 대략 비슷한 것으로 놓자. 


그러니 요한복음 1장은, 인간 문명이 발달하면서 언어도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 믿는 내게는, 첫 구절부터 턱 막히고 진도가 나가아지 못한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진짜 큰 문제는 다음이다. 소쉬르 형에 따르면 이전까지 우리는 언어라는 것이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오인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언어가 인간보다 먼저 있다는 설명도 받기 힘들지만 청각 이미지인 기표를 고려하지 않은 저런 언어관은 더욱 어색하기만 하다. 하지만 언어 기호가 가진 이런 임의성 때문에 누군가 초기에 이를 통일시켜줄 신을 우리는 필요로 한다. 집집마다 다른 그 언어를 막강한 권위로 통일하지 않으면 통용되는 언어란 태동할 수가 없으니 성서는 그런 이유로 태초에 말씀이 존재했다는 것을 설정한다. 우리는 그 말씀을 따르는 자들일뿐이고 이 세상은 그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논리상 오류가 없다. 그렇게 보면 또 진리다.


4. 아우에게

이제는 인연을 끊었기에 연락척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고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아우는 내게 아픈 기억이다. 무던히도 녀석을 좋아했지만 날 한심하게 바라보며 거리를 두고 싶어 했던 그 친구는 이제 그 바람대로 나는 영원히 모르게 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리 나쁜 추억이라도 완전히 잊을 수는 없기에 치열하게 의식 저편으로 억압해버려도 가끔은 떠오르기 마련이다. 술에 취해 칼부림을 하고, 잔소리하는 나를 원망하며 온 벽에 그 뜨거운 피칠갑을 했던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두려움, 절망감, 슬픔이라는 언어로 은유한 감정이 내게 실재가 되어 나타는 순간이고 그 단어들은 아우 이미지로 내게 고착되어 버렸다. 


어찌 아우는 내가 싫어하는 것들에만 중독되기를 바라는가? 우리 둘은 어쩌면 이렇게 중독되고픈 대상이 다른가 매번 속으로 공염불만 외울 뿐이다. 


정신분석에서 언어 구조는 무의식을 만들어낸다 했다. 무의식이 쉬지않고 언어 구조를 참조하기 때문에 그 둘은 같은 구조라는 말이다. 그럼 언어 구조가 잘못 만들어진 사람은 어떻게 될까? 언어는 부모라는 대타자를 통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며 우리에게 들어온다. 이 길고 섬세한 교육 과정에서 잘못이 일어나면 우리는 사회가 원하는 규정에 미치지 못하는 인격체가 될 것이다. 흔히 발생하는 일이고 이것 때문에 수많은 심리학자들은 지금도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정신과 의사들은 격무에 시달린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기표랑 기의가 결합하는 공식에선 그 어떤 필연도 없다. 사과가 사과로 발음되며 고양이가 고양이로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각 언어계에서 우연으로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필연이 있다고 믿기에 그 수많은 종교가 탄생하고; 다양한 신들이 제삿밥을 얻어먹으며; 위대한 신전이 지금도 건축되고; 다양한 형태로 순교를 강요당한다. 재물을 드리는 것은 기본이요. 보여줄 수 없는 "신앙"이라는 기표를 현실에서 증명하기 위해 나랑 전이가 된 종교 지도자, 그 새로운 대타자에게 많은 것을 바치고 한껏 열어야 한다. 


주일 아침부터 불경스러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시 주제로 돌아가자. 어떤 집안이나 그 집안에서만 쓰이는 특별한 단어나 표현이 있다. 가령 '잠뚱스럽다'라는 표현을 특정 상황에 꼭 쓰는 엄마가 있다고 하자. 왜 그 기표를 좋아하해서 만들어 쓰는지는 분석을 하지 않고는 알 수 없지만 그 집 아이들에겐 학교를 가서 친구들을 만나 그 단어가 사회에서는 공인받지 못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까지는 아무 문제없는 언어이다. 


우리 어머니는 이런 비슷한 사례를 많이 주었다. 기표가 귀여운 발음을 주로 이용해서 만들어낸 단어를 우리 아들들에게 가끔 사용하셨는데 조금 커보니 우리 집에서만, 그것도 아버지는 쓰지 않는, '엄마 언어'였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학교 친구들에게 그 말을 썼던 나는 무척이나 신기하고 놀랍게 나를 보는 친구들에게 창피를 당한 이후부터 조심하게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언어 기호에 이런 자의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파고든 취미인데 문제는 이런 습관이 분명 나랑 동생 언어관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좋은 쪽으로 보자면, 새로운 기표를 만들어 내야 진정한 문학이고 시詩라며 내 글을 버리는 석학들에겐 개수작이겠지만, 내 글은 아무래도 여타 브런치 글하고는 다른 부분이 있다. 


나쁜 쪽으론, 아우가 지금 겪는 외로움 불안 따위 사회랑 어울리지 못하는 불화는 결국 견고하지 못한 언어 구조 때문이 아닐까? 대타자인 엄마가 쓰는 언어가 사회에서 규정한 '아버지 이름'이랑 다르기 때문이리라. 엄마가 대타자로서 역할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그 사소한 취미가 이런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일까?


이 역시 분석을 하지 않고는 모르지만 어제저녁 오랜만에 아버지랑 통화를 한 이후 밤새 기분이 좋지 못한 이유를 찾다가 이렇게 한 자 써본다. 



모든 나쁜 것은 가족에게 돌리기를 일삼는 내가 어쩌면 가장 저주받을 놈이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고양이랑 하나가 된 내 모습, 2024, 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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