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호주에서 영주권 없이 산다는 것은 면허 없이 운전하듯이 매사에 조심스럽고, 상대가 잘못을 해도 난 큰소리 내지 못하며, 사업을 해도 빨리 달릴 수 없고, 기본 욕망 이외에는 고급스러운 취미 따위는 하기 힘든 불안한 상태이다.
그렇게까지 여기 살아야 하는가? 고국에 계신 분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애착인지 집착인지 아니면 기회비용이나 다른 목표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
내 주변에도 이런 경우는 흔히 있다. 그중에 한 친구는 벌써 20년 가까이 여기서 지냈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는지 몇 번이고 영주권 받을 기회를 잡지 못했고 이제는 거의 다 찢어져가는 비자카드에 온 가족이 매달려 있다.
이민성에서는 수시로 비자 연장 비용으로 상당한 돈을 요구하고 아이들은 선진국이라는 호주 복지 혜택을 누릴 수도 없어서 모든 생활 비용은 영주권자에 비해 두 배 세배 깨진다. 비자가 이러하니 일자리도 번듯한 것은 지원도 못해보고 집주인도 하시로 나가라 비워라 하니 삶이 고단하기 짝이 없고, 어른들이야 자기가 선택한 길이라지만 가족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세상은 너무도 불안할 것이다.
신경증이나 히스테리는 결국 ‘갈등’이 원인이라고 하는데 내 안에 자아랑 초자아 혹은 이드가 심하게 갈등 것 말고도, 이렇게 외부 요인인 ‘국가’랑 내가 갈등하는 것도 원인이 될지 모르겠다. 특히 자아가 만들어져가는 시기에 아이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간단치 않은 갈등 상황에 매 순간 시달리고 있다.
없는 집에 폭우까지 쏟아져, 지금 아이 중 한 명은 아프고 엄마는 회사에서 감원을 당했고 아빠 역시 잦은 사고 등으로 최악에 악을 더하고 있으니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심란함이 끝이 없다.
그래도 예쁜 마음은 잃지 않아서 오히려 우리가 한국 여행 가거나 손이 필요할 때는 누구보다 앞서서 우리 집 일을 도와주니 감사함을 넘어 늘 이 은혜를 어떻게 배로 멋지게 갚아 줄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우리 집에 이런저런 일로 한 번씩 놀러 오면 그 집 큰 아이가 우리 라깡이를 너무나 애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우리도 고양이를 사자고 조른단다. 문제는 비자가 언제 끝날 지도 모를 상황이라 지금은 렌트도 쫓겨나서 친척 집에 업혀 살고 있으니 고양이를 입양하는 것이 요원하다.
팻샾에서는 비자는 확인하지 않고 팔겠지만 2천 불 정도 할 것이고, 고양이 구조센터에서 입양하려면 비자 때문에 승인 서류를 받지 못한다. 아이들이 이런 복잡한 어른들 행정을 알기는 조금 무리이고 부모 된 입장에서 자랑도 아닌 속사정을 다 고백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평소 새침한 성격에 자신감도 없어하던 큰아이 성격을 이용해서
“네가 온 가족들 앞에서 고양이를 왜 키워야 하는지, 키우면 어떻게 키울 것인지 PPT 해봐.”
라는 말에 아이는 2주를 준비해서 가족들 앞에서 아주 멋지게 발표를 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고 보니 아이는 고양이 성화가 더 심해졌고 당황한 엄마는 ‘그럼 이번에는 전교 1등 하면 사줄게’라고 Deal을 했지만 ‘어찌 약속을 어기냐. 여기서 전교 1등이 왜 나오냐!’고 난리가 났단다.
결국 아이에게 백기 항복을 하고 다음 달에 비자가 취소되어서 한국 가게 되면 그건 그때 생각하고 에라 모르겠다 고양이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보험으로 든 것은 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며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는 것뿐이라고 했다.
듣고 있으니 정말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맘에 드는 고양이 좀 찾아보았냐고 했더니 위에서 말한 그대로 샾에서 사자니 형편에 어긋나고 입양하자니 서류에서 막히는 모양이다. 또 다른 문제는 아이가 우리 집 고양이 라깡이를 너무 좋아해서 라깡이처럼 생긴 애를 찾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아이는 라깡이가 세상에서 가장 맘에 드는 고양이라고 매일 이야기한다니 가끔 집사람이 라깡이 사진을 보내주는 모양이더라.
나도 가끔 라깡이 귀여운 사진 있으면 아내를 주면서 그 집에 보내주라고 한다. 그러면 마침 온 가족이 모여서 라깡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진을 받았다며 너무 기뻐하곤 했다.
이쯤 되니 내가 결단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 그림에서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과감한 결단은 최고 추장 같은 능력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당분간, 비자 때문에 호주를 떠나거나, 아이가 질려할 때까지 라깡이를 그 집에 보내기로 판결을 내려 주었다. 아내는 이런 과감하고 위대한 결단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면서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다. 평소 너무 고마운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라깡이를? 평범한 부족원으로선 당연히 이해하기 힘든 큰 결단이다.
하지만 아내를 설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소 너무도 고마운 친구들이고 딱한 사정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마침 라깡이가 프로이트랑 요즘 사이가 갑자기 나빠져서 우리 쪽 상황도 일을 도와주었다.
보낼 때는 여러 가지 물품이랑 고양이 장난감들을 아내가 잘 챙겨 주었고 나는 아이에게 라깡이를 관찰하며 스스로 분석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예전에 은행에서 선물 받은 고급 가죽 다이어리를 같이 보냈다. 물론 그것만 히떡 보낸 것이 아니고 어떻게 관찰하고 기록해야 하는지 나름 template를 정해주었고 뒤에는 몰래 20불을 넣어 주었다. 혹시 라깡이를 위해 사주고 싶은 것이 생기면 엄마에게 부탁할 필요 없이 이 돈을 쓰라는 작은 편지랑 함께.
내 생각을 좀 더 이야기하자면, 그 집 어린아이들이 지금 겪어야 하는 갈등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어려서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집안 사정으로 한 번도 그럴 수 없던 것이 늘 아쉽던 기억도 난다.
어려서 나도 강아지를 키워 봤더라면 지금처럼 감수성이 메마른 회계사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는 큰 유튜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부모 심정은 이 판결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어른들은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 다만 그 어린 친구들이 겪어야 하는 지금 갈등이 아이들 몫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하다. 그래서 외부자가 나타나 짠~하고 해결해 주는 기적을, 나는 받지 못했지만 그 친구들에겐 주고 싶었다.
잘 가라 라깡! 언제까진지 모르지만 우리 당분간 안녕이다.
프로이트 때문에 우리 집에선 만년 서열 2위였지만 그 집에선 영원한 1위일 테니 너도 누려라.
이렇게 하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다. 현실에 잘 일어나지 않는 All-wins 상황이 된 것이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