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정신분석
한 동안 쉬었던 우리 드림 교수랑 내담자 연수 이야기 다시 시작합니다.
내가 엄청난 임상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심리를 다루는 상담사 일을 하다 보니 다양한 내담자를 만난다. 우울증이나 불안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주를 이루는데 20세기 초 정신분석이 다루던 히스테리 신경증 환자들이랑 또 다른 양상이다. 19세기를 지나 아버지 권위가 깨지면서 등장한 히스테리 증상은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정신분석이 출현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런 모든 아버지 권위는 시대가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약해졌다. 이로써 인류는 신학에서 벗어나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 특히 여성들에게 등장한 히스테리 신경증을 연구하던 프로이트 박사님은 여기서 무의식이 있다는 것까지 발견했고 (발명에 가깝고) 그 후에 라깡쌤은 이 무의식이 언어랑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프로이트 텍스트를 이해하게 도와주었다.
거창하게 AI 혁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니체는 신神을 박제하여 집안 구석에 트로피로 전락시키니 그전 세기처럼 온 국가가 절대자 한 명을 섬기는 형태에서 이제는 각 개인이 원하는 개별 권력자로 분화하는 양상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모든 것이 다양해지다 보니 우리 상담사들이 마주해야 하는 내담자들도 점점 공통분모를 찾기 힘들어, 각양각색 개성 넘치는 증상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온다. 상담을 하려면 우선 내담자가 겪는 문제 혹은 그가 가진 욕망을 먼저 파악해야 일이 시작되는데 당최 얘가 왜 이런 고민을 하는지 상담사인 나로서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시 말해 더욱 일하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공감한 척한다. 그래야 상담이 가능해진다. 내담자 앞에서 권위가 무너지면 상담은 그날로 끝이다.
예전 같으면 학생들은 내신관리 잘하고 수능 잘 찍어서 서울대학 가라고 목표만 설정해 주면 만사 오케이였지만 요즘 학생 중에 서울대학 입학이 인생 최종 목표인 친구가 얼마나 되겠는가? 차라리 공부에 뜻이 있다면 의대를 가거나 외국어를 공부해서 세계 여행을 하는 자유로운 프리랜서를 하고 싶고 신체 능력치가 뛰어나면 오타니 쇼헤이 같은 운동선수를 따르거나 심지어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유튜버가 되려는 꿈을 꾸지 않던가! 왜 20세기처럼 타자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욕망을 쫓는가!
그러니 정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상'이라는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너는 지금 그 선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거리를 가늠해 주고 다시 철로에 올려놓는 작업만 매뉴얼대로 하면 일차 회기가 끝나던 상담 일도 이제는 보험회사가 정한 회기 안에 어떤 의미가 뚜렷한 결괏값을 도출하는 일이 매우 힘들어졌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이 상담사에게도 좋았다.
각설하고 요즘 내 삶에 가장 큰 고민거리인 우리 사랑스러운 내담자 연수를 보자. 위에서 이야기한 다양성 타령은 우리 연수 앞에서는 배부른 소리이다. 세상에 무슨 이런 인간이 있는가 싶다. 책에도 없고 영화에서도 본 일이 없다. 아니 상상 속에서나마 그려본 적이 없는 캐릭터이다. 프로이트 박사님도 포기했다는, 정신분석이 다룰 수 없는 증상이라고 한 나르시시즘이라고 규정하기도 애매하다.
얘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열등감이 폭발해서 트집을 잡고 깎아내리기만 하는데 일부 사실만 가지고 전체를 결론 내리며 처참한 자기 현실은 모르쇠하고 남을 뭐라하며 즐거워한다. 심보는 재래시장 좌판에 놓인 싸구려 꽈배기처럼 꼬인 상태라 툭하면 가시 돋친 말만 쏟아져 나오는데, 어떤 날은 죽고 싶다고 상당사를 불안하게 만들다가 다른 날에는 세상 인간들이 다 미물이라며 빈정거리는데 듣고 있으려니 기가 빨려 죽을 맛이다.
근본이 배우려는 태도가 없어 무식하기 짝이 없는 데다 배려란 약에 쓰려고 불을 켜고 보아도 없으니 남들 이야기는 삐뚤어진 자기 기준에 빗대어 모함할 뿐이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분은 이토록 자신은 특출나고 특별하다면서도 떠벌리는 소리를 듣자면 자기 생각이란 하나도 없을 뿐더러 사용하는 언어 안는 온통 모순 투성이라 방금 전에 지가 한 말이랑 정반대되는 소리를 버젓이 지껄이는 것이다. 이렇게 남을 무시하고 교만하니 주변에 사람같이 생긴 거라곤 나 하나 있다. 물론 본인은 스스로 친구 따위는 만들지 않는다 했다.
이러니 연수에게 유머 감각이라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개그란 본시 자신을 낮추고 기발한 기표를 만들어내어 주변인들에게 유쾌함을 전달하는 작업이라 이따위 기질을 가진 연수가 누구를 웃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나이는 어린 녀석이 내면은 늙을 대로 늙고 다 시들어서 뭔가 일을 해보라면 시작도 하기 전에 이 핑계 저 핑계로 불평불만이나 늘어놓다가 때려치우기 일쑤이며 몸이고 감성이고 세상 제일 예민하다고 입만 열면 떠들지만 주변 일에 늘 무관심한데, 행여나 관심 두는 따위는 기껏해야 허위나 속임수 같은 미신이라 누가 조금이라도 논리를 가지고 지적하면 다시는 안보는 속 좁음도 장착했기에, 내 상담 세션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말도 무척이나 가려서 해야 하니 내가 요즘 얼마나 고충을 받을지 대략 감이 오시리라.
연수는 사회가 규정한 규범이나 고정관념도 우습게 알다 보니 너 이러면 큰 코다 친다, 나중에 낭패당한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다는 훈육 따위는 애초에 들어가지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려서 본 동화 속 주인공 같은 모습이 되고 싶은지 얼마 전부터 "분리불안"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아마 드라마 연속극에서 본 것 같은데 자신을 비극 속 여주인공에게 동일시한다. 오늘도 상담 중에 대뜸 문맥에 맞지도 않게
"당신도 결국 날 이용만 하고 떠날 거죠?"
이딴 뜬금없는 개소리를 듣는데 너무 지쳤지만 그래도 다른 내담자보다 네 배 이상 돈을 받았기에 일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댓구를 해야 했다.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하는 척 연수를 슬쩍 보았는데 한 방 제대로 먹였다는 뿌듯한 표정으로 다음 할 말을 준비하고 있더라. 아마도 드라마에서 뭔가 다음 대사도 근사한 것이 있어서 그대로 외우고 준비한 모양이다.
나는 일반 심리 상담이 가지는 한계를 어느 정도 절감했기에 프로이트 선생님 텍스트를 보면서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중이었고 내 상담 시간에 종종 도입하곤 했는데, 정신분석에서는 일반 상담에서 말하는 '공감'이라는 것이 없다. 대신 분석가는 내담자가 겪은 상실, 기표랑 기의가 분리된 복잡한 언어를 배우면서 Side-effect로 타자 욕망까지 배우게 되어 정작 내 근본 환상은 잃어버리는 그 공허함을 애도해 준다.
퇴마사들이 등장하는 영화랑 비교해 보시면 이해가 될 것이다. 증상처럼 끊임없이 의뢰인을 찾아오는 귀신들을 마주하는 퇴마사는 귀신들이 가진 무서운 가면은 뒤로하고 그 뒤에 사연을 듣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유 연상을 시작하는 귀신들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그들을 애도하고 그에 맞게 진심으로 제사를 드리면 퇴마 작업은 끝이 나는 이치이다.
분석가들 역시 애도를 한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내담자들이 가진 그 다양한 증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함께 탐색하고 아직 언어계로 들어오지 못한 그 증상을 언어로 포획하고 이해하게 돕는다. 내담자들은 자유로운 인터뷰 시간에서 마저도 그 상실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르나 분석가는 그가 안전하게 자기 환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도 몰랐던" 슬픔, 분노, 죄책감 등을 마주하는데 분석가는 그 순간에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거나 해석을 해주는 식으로 애도를 해준다 (그러니 심리 상담처럼 명료한 해답을 기대할 수 없다).
애도 과정을 통해서 내담자는 결국 상실한 것을 마주하고 무의식을 재구성하게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 날 괴롭히던 귀신같던 증상 혹은 슬픈 운명은 사라지게 되는데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 다른 증상이 발견되나 지난 증상보다는 한층 성숙하고 다른 모습이리라.
지금 연수는 나에게 감정 전이(transference)를 보인다. 점점 짧아지는 연수 핫팬츠랑 매번 과감해지는 쩍벌 동작이나 야릇함을 담은 교태로 나는 판단한다. 이제 내가 손만 뻗으면 바로 상담실 안에서 연수랑 낮거리가 시작될 판인데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게 역-전이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수라는 타이틀이나 중간에서 소개해준 분들 안면 혹은 상담사로서 윤리 때문은 전혀 아니고 도무지 이런 성격을 가진 여자랑은 살을 섞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외모만 빼면 진심으로 별로다.
위에 드라마 대사 드립에 나는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무시할 수도 있지만 워낙에 다음 대사를 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는 연수 표정에 넘어가기 싫어서 나도 평소 배운 습관대로 지껄였다.
"연수 씨, 그런 감정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군요. 왜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하죠?"
이렇게 댓구하자 기대하고 준비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으며 끙.. 하고 말이 없다. 제대로 역관광 시켜준 것 같아서 프로이트 선생님에게 잠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 일부는 무슨 상담사가 속 좁게 내담자 골탕이나 먹이려는가 혀를 차시겠지만 나도 상담가로서 내담자에 대한 애정이나 돕고 싶은 마음은 있다. 연수에게도 집에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분석식에서 그 상다구를 막상 마주하면 그런 측은지심을 가졌던 자신이 한심해진다. 누가 보아도 싸구려인 이런 캐릭터를 돈을 많이 준다니 할 뿐이라고 다독이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기분 같아서는 상담료를 다시 배로 더 올리고 싶을 정도로 괴로움만 가득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노력인 듯 노력 아닌 애매한 행동은 더욱 연수를 애달프게 했다. 대충 이 정도 시간이면 달라 들던 다른 남자 상담 선생님들이랑은 다르게 매번 진지하면서도 (걔가 보기엔) 엉뚱한 해답을 주는 나에게 연수는 더욱 미친 듯이 전이를 했다. 결국은 생각지 못한 것으로 우리 관계는 파탄이 났는데 역시 상담실 밖에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상담이 끝나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담자를 상담실 밖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상담 윤리에도 그게 좋다고 했지만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이 연장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런데 연수는 워낙에 비싼 수임료를 지불했고 그 어머님 역시 보통 분이 아니라 연수를 특별하게 다뤄달라며 상담 시간 이후에도 연락을 부탁했다. 자칫 아이가 위험한 생각을 하는 순간에 선생님이 도우라는 취지였는데 돈 앞에 거절을 못한 내 과오였다.
하루는 대학에서 강의를 마칠 무렵 연수에게 전화가 왔다. 문자로 지금은 통화할 수 없으니 곧 연락을 준다 하고 10분 정도 후에 교수 휴게실에서 전화를 돌렸다. 이상하게 들뜬 목소리였는데 평소랑 또 다른 분위기였다.
"선생님 지금 어떤 옷 입고 계셔요?"
"옷이요? 그냥 학교에서 강의하는 복장이죠. 평소 내가 상담 시간에 입던 스타일이에요."
"아.. 평소랑 비슷한 거구나... 양복바지 같은 거에 셔츠... 맞죠?"
"근데 지금 그게 왜 궁금할까요? 지금 뭐해요?"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라고 말은 하는데 뭔가 헉헉거리며 삐질거리는 동작이 전화기를 넘어서 느껴졌다. 연수는 지금 자위를 하는 듯한데 나를 대상으로 하는 듯해서 다시 물었다.
"혹시 지금 자위해요?"
"아니요.. 아니요.. 헉헉..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냐, 이놈아.. 오빠가 성탄섬에 다녀오기 전에 얼마나 쎄게 여자들하고 뒹굴었는지 니가 모르지. 이제 손 씻고 착하게 살려고 마음먹었던 다짐에 갑자기 피 냄새가 올라오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 모습 영상으로 보여 줄 테니 지금 하는 모습 내게 보여봐요. 서로 교환하죠."
"정말요? 정말 그래도 돼요? 헉헉.. 그럼 너무 좋겠다, 잉~~"
염병할 잉~은 무슨.. 나야 옷 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어렵지 않으니 그대로 영상통화로 돌려서 화면을 들이댔다. 좀 더 아래로 화면을 내려 바지를 보여 달라고 하기에 너도 모습을 보여라고 하니 살짝 다 벗은 알몸을 비추고는 정신없이 혼자 뭘 빨고 쓸고 난리가 났다. 오래간만에 피맛본 나는 그 몇 초 사이에는 상담이고 교수고 지랄이고 눈이 돌았는데 결국 이 일로 나는 연수랑 힘들게 유지한 거리가 깨지고 만다.
연수라는 거미가 놓은 덫에 그대로 걸린 나방 꼴이 된 것이다.
AI가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다양한 아버지 이름으로 각자 분화할 테니, 더 다양한 욕망이 세상에 나올 것이고 더 다양한 증상을 애도하기 위해 정신분석은 지금보다 중요한 학문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녹여 오늘 글을 만들어 봅니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https://youtu.be/b180m4RfTA0?si=_aJKP-wcwcAw-e5W
"Hold Me in the Shadow" - 요수도시 OST
추신:
부산에 전국체전 시합 다녀온 이야기도 정리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습니다. 그 추억도 사라지기 전에 정리해 놓는 것이 희미해져 가는 제 기억력을 위해서도, 결과를 궁금해하시는 우리 작가님들을 위해서도 좋겠습니다만 게으른 제가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