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 취업, 그리고 병역까지 중도포기 해봤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만약에 그것을 포기했더라면 지금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걸 중간에 그만뒀다면 날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테고, 오늘날 사랑스러운 동물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삶이다.
삶을 중도포기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10대, 그리고 10대와 20대 사이에 종종 그랬다. 이유는 그때마다 달랐다. 가장 먼저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이유는 정확히 기억난다. 담임 선생님이 무서워서였다. 그때 하던 말로 ‘호랑이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 돼서 삶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그때가 열 살이었던 것 같다.
여남은 살이 지나고 나서부터 삶을 포기하려고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언젠가는 학업에 실패해서 그랬고, 언젠가는 학교 가기 싫어서 그랬고, 언젠가는 남아있는 삶에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살을 시도했었고, 그럴 때마다 “죽고 싶다”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정말로 그랬을까? 정말로 죽고 싶었을까. 그에 대해 꾸준히 생각했다. 죽고자 하는 시도를 끝낼 때마다 몇 시간씩 생각하곤 했다. 때로는 인간이 어째서 사는지를 곰곰 따져 묻기도 했다. 매우 철학적인 질문이었으나 그때 당시 나는 철학이란 학문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나긴 질문에 대한 답은 철학이 아니라 생물학으로부터 나왔다.
“세상에 죽고자 하는 생물은 없다. 인간이 죽고자 하는 이유는 생물이 하기엔 부적절한 행위다. 그러므로 어딘가 잘못됐다.”
만약에 반례를 들고 싶다면 말씀을 거두어 주시길. 아주 오래전에 내린 결론이고, 그때 당시 나는 교복을 입고 반나절을 보내곤 했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인간은 “죽고 싶다”라고 말하는 걸까. 실제로 그렇게 말하며 산 적이 있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표현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말이 갖는 무게에 겨뤄 보면 너무 단순한 표현을 썼다.
“죽고 싶다”라는 말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굉장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만약에 “죽고 싶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자기를 뺀 세상이나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으며, 그렇게 말하여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겠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나를 괴롭히는 문제(‘이렇게’)가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주체가 ‘나’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즉,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것을 푸는 방법만 알면 된다. 그 방법이 자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자살을 옹호하지 않는다. 죽음은 무엇도 끝내지 않는다. 만약에 자기가 죽어야 어떤 문제가 끝난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다. 그 문제는 끝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거다. 죽음은 무엇이든 끊는다. 삶과 인간을 끊어내면서 그에 걸쳐있는 모든 것, 예컨대 문제 따위를 끊어버린다. 결코 문제를 끝내거나 무언가를 완성시키지 못한다.
삶은 그 자체로 가능성이다. 살아있다면 어떤 문제든 풀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