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뇌는 부정성 편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보다 세 배 더 잘 기억한다고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세 배나 더 못 잊는다.
야생에서 살아남을 적에 우리 인간은 긍정보단 부정을 더 중요시해야 했다. 만약에 부정보다 긍정을 더 잘 인지했다면 나무에 달린 사과를 보더라도 수풀에 숨은 뱀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유전자를 갖고 있는 개체는 진즉에 씨가 말랐고, 그에 따라 우리는 부정적인 것, 다시 말해 위험을 세 배나 더 잘 기억하는 특성을 지녔다.
인류의 유산인 셈이다. 살아남은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유산. 다만 나는 그 유산을 조금 지나치게 넘겨받은 듯하다.
미운 사람이나 나쁜 사건을 잊지 못한다. 작은 일도 잊지 못한다. 예를 들어, 수년 전에 호텔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 열림(◁▷) 버튼이 아니라 닫힘(▷◁)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뒤따라 오던 여자 승객이 어깨를 다쳤다. 그 승객의 무리가 나를 두고 뭐라고 하지 않아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끝내 죄송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후다닥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떠난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실수였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사과는 용기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터무니없을 만큼 수줍음이 많았기에 내가 저지른 잘못조차 사과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찌 보면 작은 사건이다. 그 여자 승객은 다 잊었을지도 모른다. 나만 잊지 못하고 있는지도, 아니 그럴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나마 사건은 기억 속에 머물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미운 사람은 여전히 살아있고, 설령 죽었다고 하더라도 노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만큼 나는 부정적인 것을 오래도록 기억한다.
앙심(怏心)은 아니다. 그처럼 달갑지 않은 감정이긴 하다. 미운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좋은 느낌이 나진 않는다. 가끔은 그들이 어딘가에서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 못난 마음씨 때문에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쓰레기처럼 살고 있는 그들을 상상한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다.
맞다. 미운 사람을 노여워하거나 나쁜 사건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미워도 용서하는 게 맞다.
용기 있는 사람이 사과를 한다면, 용서하는 사람은 뭘 가지고 있어야 할까. 넓은 마음씨? 내 마음은 벼룩의 간보다 더 작은 듯한데 어떡하나. 긍정스러운 추측? 그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라고 상상하기? 아니, 그렇지 않아. 그들은 나빴어. 난 불쌍하고.
아무리 따져 봐도 용서는 잘 잊는 사람이 잘하는 듯하다.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잘 잊는 사람이 되고자 애쓸 작정이다. 무슨 짓을 해도 잊지 못하는 건 놔두되 억지로 무언가를 붙잡고 있지 않으려고 하겠다.
놓아주기. 놓아 버릴 용기를 가지기. 어쩔 수 없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하기.
그만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