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로 Dec 18. 2022

싫어하던 게 좋아진다는 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선망의 대상과의 첫 만남


내게는 아날로그 기록에 대한 일종의 선망 비슷한 게 있었다. 값비싸 보이는 가죽 노트와 만년필 한 자루를 가지고 다니며 무언가를 바삐 기록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내가 '아날로그 기록'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였다. 


왜 내게 그러한 이미지가 각인된 것인지는 여전히 알 방도가 없다. 겨우 짐작해볼 수 있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만년필이라는 필기구는 내게 아날로그 기록의 정점과 같은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런 내가 만년필에 관심을 갖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날로그 기록에 도전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면서도 만년필을 두 자루나 갖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이와의 첫 만남은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값어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충격에서 오랫동안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준에서 나름의 거금을 투자해 구매한 만년필의 필기감이 1,000원짜리 볼펜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잠깐 동안의 불편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린 시간이 한 달을 채우자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이후에 만년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나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만든 변화


만년필은 나와 맞지 않는 필기구라는 확신에 '혹시?' 하는 물음표가 찍히게 된 건, 불렛저널 다이어리를 1년 이상 기록하고 난 이후였다. 아날로그 기록을 3개월 이상 지속하지 못하던 내가 기록을 이어가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기록에 취향이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지대하다는 점이었다. 


기록이 지속되지 못했던 원인이 '기록이 나와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와 맞는 기록의 방법을 찾지 못해서'라는 걸 알게 되자 만년필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작은 희망이 생겨난 셈이었다.



날이 좋은 날을 골라 만년필 투어에 나섰다. 수십 개의 만년필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매장을 직접 찾아 여러 제품을 시필해 보기로 했다. 나와 맞는 기록의 방법을 찾게 된 건 우연이었을 거란 의심이 빼꼼히 고개를 들었지만, 만족스러운 만년필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나에게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해줬다.


만년필에서 드디어 취향을 찾았다


만년필 매장에 방문하기 전,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몇 가지 제품을 미리 찾아보기로 했다. 적어도 이 제품들은 꼭 시필을 하고 오자는 나름의 비장함이 담긴 준비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품을 구매 후 돌아왔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그렇게 내가 구매한 제품은 플래티넘의 프로시온이라는 만년필이다. 반짝거리는 푸른 빛깔의 만년필 색상은 물론이고, 흔히 버터필감이라고 부르는 부드러운 필기감이 매력적인 녀석이다. 라미와는 다르게 만년필 뚜껑을 열 때 돌려 열어야 하고, 펜을 잡는 부분에 홈이 파여 있지 않는 게 퍽 마음에 든다.


라미 만년필을 쓰면서 EF촉이 내게는 너무 얇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터라, 펜촉은 가장 두꺼운 M촉으로 정했다. 제품, 색상, 펜촉 두께, 각인 여부와 문구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내 손으로 직접 선택해 고른 만년필의 만족도는 실로 대단했다.



취향에 맞는 만년필을 구매하고 나서, 아날로그 기록에 대한 흥미도 배로 늘었다. 아날로그 기록을 즐겨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과 맞는 필기구를 갖고 있는 건, 단순히 필기구에 욕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맞는 필기구가 주는 기록의 즐거움 때문이었을 거란 추측을 그제야 해볼 수 있었다.


취향이 삶에 주는 놀라운 가치에 감탄하며 사는 요즘이다. 사소하지만 진한 취향을 알게 된 이후로 나의 삶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이번처럼 이미 무어라 단정 지어버린 일들에도 '혹시?'라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던진 물음이 나의 또 다른 취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여전히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만년필에 이어 나는 어떤 것에서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게 될까?

작가의 이전글 내년에 쓸 다이어리를 고른다는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