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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Oct 10. 2022

써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의 만년필 취향을 찾아서

만년필은 나와 맞지 않아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만년필은 나와 맞지 않는 필기구란 생각을 하며 지냈다. 내 이름이 각인된 만년필 두 자루를 사용하고 나서 느낀 점은 딱 그거 하나였다. 아쉬움이 남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용하면 할수록 정이 가기는커녕, 불만만 늘어가는 필기구와 함께 기록 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런데 최근에 다시 만년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만년필과 조합이 찰떡이라고 소문이 난 미도리 MD 노트를 일기장 용도로 구매하면서부터이다. 이제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대책 없이 맑은 희망과 함께 만년필을 다시 쥐었다. 너무 오래 사용하지 않은 탓인지 만년필은 종이 위에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고, 나는 그런 녀석을 싱크대 앞으로 데려가 정성스레 세척을 해 주었다. 다시는 사용할 일이 없을 것만 같던 만년필은 금세 말끔해졌다.


처음 손에 쥐었을 때보다 더한 이질감이 몰려왔다. 종이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새어 나오는 소리가 다른 필기구로는 채우지 못하던 만족감을 선사했지만, 몇 줄 채 적지 못하고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동안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았는지를.



그런데 이번엔 필기구 본연의 문제라기보단, 어쩌면 내가 사용하는 제품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게 만년필의 매력인데 내가 아직 익숙지 않아 그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직접 사용을 해 보기 전까진 어떤 제품이 나와 맞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들의 평이 좋은 제품을 사면 그나마 위험은 덜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1,000원짜리 볼펜에도 취향이 있는데, 만년필이라고 다르겠어?


어쩌면 아직 인연을 찾지 못한 것일지도?


만년필 자체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곳에 생각이 닿자,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으로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사용해 보고 싶단 욕심이 생겼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오프라인 매장을 검색했고,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방문할 수는 없으니 부담이 없는 가격 선에서 눈에 들어오는 제품을 몇 가지 찾아보기로 했다. 가성비가 좋기로 소문난 트위스비 에코 만년필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만년필 브랜드 외에 펜촉 크기를 바꾸는 것도 고려 중이다.


만년필로 일기와 모닝 페이지를 기록하면서 깨달은 건데, 입문용으로 추천되는 EF 펜촉이 내게는 너무 얇은 것 같다. 만년필의 필기감과 종이 위에 남는 기록이 잘 매치되지 않아 이질감이 더해진다. 기록을 하는 내내 '조금 더 두꺼웠으면 좋겠다', '잉크가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와 같은 생각을 해놓고, 왜 여태까지 펜촉을 바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건지 의문이긴 하다.


써 봐야만 아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오래 써 봐야만 아는 것들도 있다. 만년필은 전자에도 해당하고 후자에도 해당하는 아주 요상스러운 필기구이다. 그런데 인생을 돌아보면 쉽게 얻어지는 것들은 대체로 매력이 떨어졌으니, 그 진리를 이번에도 조심스레 대입해 본다면 아주 보람찬 여정이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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