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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Sep 02. 2022

내가 아날로그 기록을 놓지 못하는 이유

나만의 기록의 취향을 찾아서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록형 인간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계획을 세우는 것을 즐겨하고, 일정 관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강박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다. 다이어리에 적힌 것들 중에서 그날에 완료하지 못한 게 하나라도 있으면 잠에 들지 못했다. 마지막 체크 표시를 하기 위해 밤을 꼬박 새웠다. 


효율을 더욱 높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기록의 장소는 자연스럽게 종이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갔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파격적으로 줄어들자 불안감은 점차 사그라드는 듯했다.


Photo by Paico Oficial on Unsplash


하지만 자기 착취 행위의 말로가 좋을 리가 없었다. 착각이었다. 늘어난 효율성과 생산성만큼 삶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24시간을 마치 30시간처럼 살 수 있었지만 삶의 모습은 내가 바라던 것에서 멀어져만 갔다.


결국 효율성에 대한 집착을 조금 내려놓기로 결단을 내렸다. 내가 바라는 삶을 되찾기 위한 선택이었다. 비효율적인 일처리를 마주하면 여전히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지만, 개인을 위해 남기는 기록만큼은 예외로 두기로 했다. 효율성과 지향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나름의 적정선을 찾는 하루가 이어졌다.


불렛저널을 만나고 삶이 달라졌습니다


스스로의 삶에게 여유를 선물한다는 마음으로 아날로그 기록 주변을 쉬지 않고 서성거렸다. 아날로그 기록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플래너 쓰기에도 도전했고, 인스타그램에 자주 올라오는 독서 노트를 작성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3개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슬픈 일이다. 탐이 나는 기록 방법이 있는데도, 그것이 내게는 맞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기 위해서 수십 권의 다이어리를 버려야만 했다. 생산성과 효율성에 대한 집착을 일부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이것 역시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날로그 기록 앞에서 언제나 그것들에 발목이 잡혔다.


Photo by Noémi Macavei-Katócz on Unsplash


불렛저널을 만나고 삶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덜컥 겁이 났다. 누가 애쓰게 만든 다이어리조차 3개월 이상을 쓰지 못하는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직접 만들어야 하는 불렛저널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시간은 흘러 불렛저널 다이어리를 기록한 지 오늘로 딱 1년이 되었다. 신기한 일이다. 나도 내가 어떻게 이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건지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최근 불렛저널 다이어리 기록법에 관한 전자책을 내면서 언뜻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불렛저널의 기록법이 여느 아날로그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뿐이었다.


불렛저널은 아날로그의 기록 방법을 차용하지만, 성격은 디지털에 가까운 기록법이다. 애초에 시작이 '관리'에 있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를 채울 모든 양식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기록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닌 기록을 하게끔 만드는 불렛저널만의 매력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게 기적이 일어났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


사람마다 기록을 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나는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어딘가에 기록을 남기는 일상이 지속될수록 기록되지 않은 것은 휘발되고 만다는 혹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나의 기록은 크게 디지털 기록과 아날로그 기록으로 나뉜다. 여전히 생산성과 효율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에서이다. 이제는 불렛저널 다이어리도 기록하고 있으니 아날로그 기록에 대한 내성이 조금은 커졌을 거라 예상하며 이전에 실패했던 기록에 도전해 보았으나 그것까지는 아직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Photo by mk. s on Unsplash


디지털 공간에서 하지 못할 기록이 없는 요즘에도 내가 여전히 아날로그 기록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록마다 최적화된 채널과 방법이 존재한다. 특정 주제에 대한 깊은 사유가 필요한 기록은 언제나 종이 위에 남긴다. 예열이 되기까지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는 사람 중 한 명인 내게 키보드는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지와 같다. 내게는 준비운동 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이 없다. 그럴 때는 생각의 속도와 발을 맞춰줄 수 있는 빈 종이와 펜 한 자루가 매번 유용하게 쓰인다.


내가 남기는 대부분의 기록은 결국, 종이에서 시작해 디지털 공간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취향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는 이번의 기록도 그러하다. 산발적으로 천천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기엔 자유로움이 가득한 백지 위의 공간이 좋고, 그렇게 모인 생각을 하나로 엮기엔 무한한 디지털 공간만큼 적합한 게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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