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로 Aug 26. 2022

술이 달면 하루가 인상적이었단 뜻이라던데

술의 취향 | 내게도 나름의 취향이 생겼다

술맛이 어떠냐


좋아하는 드라마인 '이태원 클라쓰'에는 술과 관련된 유명한 장면이 하나 있다. 전학 첫날, 장가 회장의 아들과 사건이 생기며 주인공인 박새로이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아들의 신념을 지켜주고자 아버지마저 헌신적으로 일을 하던 회사에서 쫓겨난 뒤 둘은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아버지는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라며 아들에게 술을 권한다. 주인공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를 단숨에 들이켠다.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아버지는 그에게 묻는다. '술맛이 어떠냐?' 술맛이 달다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 아버지는 말을 잇는다.


오늘 하루가 인상적이었다는 거다



드라마 대사 외에도 주위 어른들에게 자주 들어온 말이다. 인생이 쓸수록 술이 달게 느껴진다나 뭐라나? 술이 달게 느껴지는 건 인간의 착각일 뿐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기도 하지만, 삶을 가만히 지켜보면 유독 술이 달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조금 살았다'라고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나도 착각을 하는 걸까?


술에도 취향이 있다고요?


술에도 취향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내 취향은 도무지 모르겠던 20대가 지났다. 20대 시절 나에게 술은 어른이 되었다는 자각임과 동시에 사회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 했던 동료이자, 아주 가끔씩 기대어 쉴 수 있는 휴식처와 같은 것이었다.


20대 초반에는 마냥 좋기만 했다. 어른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술을 드디어 손에 넣은 순간 진한 해방감이 몰려왔다. 사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이 되었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24시간 안에 사람이 달라져봤자 얼마나 달라지겠어?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알은체 할 수도 없었다. 아니 그러기가 싫었다. 해방감에 도취된 이들과 손에 손을 잡고 대학로를 쏘다녔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간을 가진 신입생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벌이고 다녔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자 술을 마시는 행위는 더 이상 새롭지 않았다.


Photo by Ridham Nagralawala on Unsplash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술을 마셔야 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늘어가는 술 약속과 함께 술에 대한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정신없이 술잔을 부딪히고 난 후에는 여지없이 거대한 공허함이 빈자리를 채웠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에게 술의 취향이란 그저 맥주와 소주 사이의 선택 같은 것이었다. 아주 가끔 소맥이라는 변수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술에도 취향이 있습니다


술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술에서도 취향을 찾게 되었다. 낭만보다는 생존을 위한 일에 가까웠지만, 가볍게 목을 축일 수 있는 맥주의 취향은 물론이고, 내게도 선호하는 주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이제는 여행을 가면 그 나라에서 유명한 맥주를 마셔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누군가가 술에 대한 취향을 물을 때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답할 수 있는 술들도 몇 가지 지니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Photo by Stanislav Ivanitskiy on Unsplash


향이 두드러지는 술을 사랑한다. 고흐가 즐겨 마신 술로 유명한 압생트(Absinthe)와 독특한 우디 향이 매력적인 라프로익(Laphroaig), 한 모금에 다채로운 허브 향이 밀려오는 몽키 47(Monkey 47)이 나의 술에 대한 취향의 교집합에 들어간다.


술만 마시는 것보다는 술과 음악 또는 책과 같은 문화생활을 함께 즐길 수 있거나, 좋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상황을 선호하는 편이다. 좋은 예로 연희동의 좁은 골목 사이에 위치한 책바라는 공간을 들 수 있다. 좋아하는 술을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책을 사랑하고 술에 대한 취향이 명확한 자들에게는 소중한 아지트와 같은 곳이지.


'인생에서 술이 꼭 필요한가'라는 고민은 요즘도 종종 하지만, 커피와 차를 비롯한 다른 음료가 술을 대체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에 이제는 온 마음으로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렷한 취향이 늘어간다는 건, 내가 그만큼 뾰족한 사람이 되어 간다는 뜻이고, 나의 세계가 한 뼘씩 넓어지고 있단 증거가 된다. 그러니 나에게 술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좀처럼 친해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분야가 있다면 그 속에서 나름의 취향을 찾는 시간을 보내 보자. 이건 나와 안 맞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나도 모르던 작은 행복을 찾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이전 03화 흘러가는 기억을 잡기 위해 커피를 마십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