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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Feb 21. 2024

밤비

쇼팽 에튀드와 히사이시 조

    피아노에 붙기에는 꽤 과분한 이름이다. 밤비를 사슴이 아니라 피아노로 먼저 알고 있었을 때부터 나는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는 내가 태어난 그 날부터,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좀 전부터 먼저 이 세상으로, 그리고 우리 집으로 와 있었다. 엄마가 어떤 기대와 함께 이 피아노를 집으로 들여왔는지, 그저 교회 피아노 반주자인지 아니면 세계적인 거장이 되는 것이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 미래의 집을 그려보자 하는 선생님의 말에 당연하게 커다란 집과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피아노를 가장 먼저 그려 넣었다. 크레파스가 뭉툭해 그림이 엉망진창이 된다고 해도 난 기어이 색을 칠해냈다. 내 피아노는 어쩐지 가라앉은 그러나 너무 무겁지만은 않은 갈색으로 항상 그 자리에 존재했다.

    밤비가 내 키보다 훨씬 컸던 때, 나는 주말 대부분을 밤비와 보냈다. 그 시간들 동안 내가 온전히 피아노를 친 것은 아니다. 나의 모든 생활을 피아노 의자 위에서 보냈다는 뜻이다. 피아노 커버를 닫아 놓은 채 일주일동안 밀린 학습지를 풀고, 다시 그 위에서 밥을 먹고, 커버를 열어 피아노를 쳤다. 

    습관처럼 같은 곡을 쳤다. 새로운 곡을 연습해야지, 마음 먹다가도 익숙해지는 과정이 금새 질려버려서 그만두었다. 일요일마다 하얀색 반스타킹을 신고 털털거리며 교회를 가면서, 나는 어렴풋이 내가 피아노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히사이시 조의 곡만 치게 된 것은 발버둥이었다. 그래도 나는 피아노를 정말로 사랑했다. 내가 피아노를 미워하는 마음은 미워하는 그 순간에만 딱 존재했다. 

    내 키보다 훨씬 더 컸던 갈색 피아노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나는 피아노를 그만두었다. 18살 여름, 햇빛이 우거진 나뭇잎 사이를 비추면서 떨어지던 날, 기숙사로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돌아본 피아노는 뽀얗게 먼지가 앉아있었다. 쇼팽의 에튀드를 담은채로, 히사이시조의 음악을 담은채로, 그리고 나를 담은채로. 

    내가 피아노를 생각하면서 한 겹 두 겹 쌓아 두었던 마음들은 자꾸 어디선가 나타나 나를 두드렸다. 내가 건반을 두드렸던 시간들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음악시간 10분 전 숨이 차도록 달려 먼저 도착한 음악실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5분 남짓한 시간동안 검정색 그랜드 피아노를 쳐다보고만 있어야 했다. 밤비와 다르게 뚜렷한 가운데 도 소리가 나는 피아노는 아무래도 어색했다. 

    사람이 그러하듯 피아노 역시 늙어간다. 스무 살 내가 아직도 미성년의 시간에 헤매는 반면, 밤비는 정직하게 이십 년의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 우직함이 필요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같은 선율을 내뱉는 올곧음. 세게 누르면 누르는 대로, 부드럽게 훑으면 속삭일 수 있는 솔직함. 나는 아마 나에게는 부족한 것을 그 아이를 통해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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