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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Sep 24. 2023

남편의 수험생활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함께 저녁 산책을 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남편은 말했다.

"계절이 딱 지금만 같으면 좋겠어요."

남편은 덥고 습한 건 괜찮은데 추운 건 무섭다고 한다.


5월쯤, 남편은 하반기에 있을 승진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승진했는데 또 무슨 승진시험이냐고 물었더니 현장 최고 책임자까지 승진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원래는 내년에 치를 계획이었는데 올해 고3인 아들 k가 공부할 때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게 남편의 생각이었다. 

"각 과목별로 60점만 넘으면 통과하는 시험이라서 예전에 자기가 준비했던 승진시험처럼 몇 년에 걸쳐 독서실 다니면서 까지 준비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따로 할 건 없어요. 그리고 '아빠도 공부한다.'는 걸 아들한테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아들에게 "아빠도 수험 생활에 동참한다. 아들 파이팅!" 하는 의도가 더 짙어 보였다.


남편의 말대로 시험공부가 시작되어도 우리의 생활 패턴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우리 부부가 분담했던 가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60점만 넘기면 되는 시험인데......'

난이도도 모르는 나는 남편의 말만 듣고 가볍게 생각했다.

우리 집 가사 분담은 이렇다.

이를테면 식사 준비, 음식 차리기, 냉장고 관리 등 주방 관련한 것과 욕실 청소는 내가 담당하고, 욕실을 제외한 청소, 빨래 세탁, 음식물 쓰레기 비우기는 남편이 담당한다.


6월쯤이었나? 퇴근해서 집에 갔더니 너저분함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보, 오늘 청소 안 했어요?"

"응, 어제 늦게까지 책을 봤더니 많이 피곤해가지고...... 그래서 오늘은 공부하다가 좀 잤어요."

"잘했어요. 공부할 때 컨디션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공부하다가 피곤해서 잤다는 사람에게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60점만 넘으면 된다고 했으면서......' 하는 소심한 반감이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60점 통과 시험은 우리의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식사 준비가 다 돼가면 수저를 가지런히 놓아주던

식사를 마치면 음식그릇, 접시를 개수대까지 옮겨주던

식탁을 깨끗하게 닦아주던

"음식물 쓰레기 다 나왔어요? 비우면 돼요?"하고 물어봐주던

건조된 빨래를 각 잡아 개어 놓던

저녁 근무 들어가는 날 낮에 깔끔하게 청소해 놓던

아들의 교복 셔츠를 빳빳하게 다려놓던

저녁 식사 후에 나와 함께 가볍게 산책하던......

남편의 모습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빠짐없던 기타 수업과 탁구도 다 끊어버리는 게 아닌가.

60점만 넘으면 된다고 했으면서.


대신 늘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한글 파일로 요약정리를 하고 있었고, 가끔은 허공에 시선을 두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공부한 내용을 복기하고 있었다.

둘이서 하던 가사를 오롯이 나 혼자 하려니 집안 곳곳에도 표가 났다.

밥 먹고 곧장 설거지하면서 식탁 닦는 걸 깜박해 식탁 위의 얼룩이 그대로 말라 버린 것을 다음 끼니 먹을 즈음 발견한다든지 건조된 빨래는 제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건조대에 널린 상태에서 각자 알아서 필요한 것을 찾아 입고 챙겨가게 되었다.

그 외 음식물 쓰레기 비우기, 교복 셔츠 다리기, 집청소까지 가랑비 옷 젖듯 내 몫으로 왔다.


"그러니까 자기가 따로 할 건 없어요. 그리고 '아빠도 공부한다.'는 걸 아들한테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문득문득 시작할 즈음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속으로 "욱!" 하면서 그 말을 꺼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난날 나의 승진고시 준비기간 2년 하고 6개월 동안 남편과 친정어머니가 아무 걱정 말라고 나를 지지해 줬던 걸 생각하면 차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2년을 넘게 나를 도와줬는데 고작 5개월을 못 기다려 주랴.


지난주 수요일, 남편은 시험을 치렀다.

지문이 너무 길어서 시간이 부족하더라, 마지막 다섯 문제는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답을 바로 마킹했다, 고사장 나오면서 직원들하고 이야기했는데 문제를 많이 꼬아서 출제했더라는 말을 하더라......

이렇든 저렇든 남편은 시험을 통과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시험 당일 저녁에 남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식사 후 식탁을 닦았고, 음식물 쓰레기도 비웠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들의 교복 셔츠 두 벌이 빳빳하게 다려져 있었다. 

전 날 내가 잠들고 난 후에 남편이 다려 놓은 것이다.

건조대에 널브러져 있던 수건도 예쁘게 개서 욕실 수납장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우리 집이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시험도 끝났고, 날씨도 선선해졌으니 이제 저녁 산책도 같이 합시다."

어제저녁 식사 후 남편과 산책을 시작하면서 장미 공원 트랙을 다섯 바퀴 돌자고 제안했다.

"j 씨, 계절이 딱 지금만 같으면 좋겠어요."

남편은 지금의 계절을 좋아한다.

이 계절을 여유 있게 느낄 수 있도록 시험 일정이 9월 중순인 것도, 남편이 열심히 노력한 것도 다 고맙다.

우리는 자연의 변화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흡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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