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는 것이 꼭 다음 단계일까
"어떻게 낳기로 결정했어요?"
아이를 싫어하진 않지만,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보다는 잘 키울 자신이 없었고, 과연 행복하게 자라나도록 내가 인도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난 아이를 낳지 않고 싶었다. 그런 내가 마음을 돌이켜 임신을 했을 때, 출산을 했을 때, 육아를 해나가고 있는 요즘까지. 나는 종종 이 질문을 듣는다.
소문난 걱정 부자에,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여서였을까. 이 질문의 답은 너무 간단해서 나는 오히려 뒤가 아닌 현재를, 그리고 앞을 내다보게 된다. 아이를 낳은 삶을 살아가는 지금을 그리고 앞으로를.
'Evidence-based'
주장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그 근거는 그저 상념이 아닌 연구결과의 토대로 혹은 다수의 경험이 쌓인 결과로 가능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배웠던 대학시절, 처음에는 다소 낯설던 이 문구는 이제 직업관을 뛰어넘어 내 삶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직업병을 달고 사는 걸까 싶지만, 이 문구로 인해 나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이를 낳는 게 우리 관계에 있어 다음 단계라고 생각해."
남편이 건넨 이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찾아보고자 시간을 꽤 들였다. 그 사이에 우리는 잠시지만 해외에서 살다오기도 했고 나는 새 직장을 구해서 일을 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주변에 이미 결혼한 친구들과, 아이를 낳고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번갈아가며 조언을 구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딱히 부정적인 무언가를 건넬 사람이 없었을까. 시간은 흘러갈 뿐 나는 'evidence'라고 할 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나에겐 종교적인 이유도 존재했기에 더더욱 내가 원한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아이가 너무 갖고 싶어도 생기지 않아서, 심지어 시험관시술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실패해서, 결국 아이가 없이 살아가는 부부는 실재한다. 하지만 그보다 이 시대에는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는, 이전의 나와 같은 사고를 가진 이들이 참 많다. 남편의 말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들의 삶을 다 부정하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그럼에도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아이를 원치 않는 것에 대해 양쪽이 다 오케이가 아니고 한쪽만 오케이인 경우에 다 나 같으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적어도 더 확실한 신념을 가진 쪽으로 방향이 결정되긴 하겠지.
그렇게 아이를 갖고,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제 두 돌이 다 되어가는,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크는 아이를 지켜보며 나는 남편의 말을 다시 떠올려본다. 이것이 남편이 원한 다음 단계인 걸까. 이것이 내가 끝내 반박하지 못한 남편의 주장에 대한 바람직한 결과인가 하고.
그리고 제목에 써둔 질문의 답을 아직은 내리긴 이르다는 결론을 스스로 찾는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가 가졌던 신혼기간이 만 3년, 그리고 아직 두 돌이 되지 않은 아이여서 그런 걸까. 우린 부쩍 많이 다투고 싸우고 서로의 감정이 이전 같지 않다고 투덜거리며 이전과 같은 애정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감정의 틀어짐을 오래 간직한 채 육아에 임할 수는 없기에 각자 그리고 함께 감정 털어내기의 속도를 빠르게 높이기에 집중하고 나도 상대방도 안쓰러워하고 기특해하며 하루하루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렇다, 아니다 를 지금 결론 내리기엔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일반화시키기엔 다소 부적절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해당하지 않는가 싶기도 하고.
혼기가 차서 연애만 하고 있을 때는 결혼은 언제쯤 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결혼을 해서 신혼을 즐길 땐 아이를 언제 낳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이를 하나 낳고 나니 다음은 언제냐고, 생각은 있냐고 질문을 받고 있다. 사실 이러한 질문에 악의가 없음을 알고 있기에 나는 관심이 기반이 된 애정 어린 질문이라 생각하지만, 다들 이렇게 물어볼 때는 비단 남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은 출산이 결혼의 다음 단계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긴 하다.
그런 반면 지금을 본다.
"엄마"라는 말을 들을 때 그 말에서 느껴지는 신뢰감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동시에 내 삶에도 무게를 더하게 되고, 손인사 하는 것을 좋아해서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인사하는 것을 보며 나 자신의 태도까지 단정하게 만들고, 기저귀를 갈거나 잠자리를 미리 정돈하는 등 너무나도 일상적인 순간들 속에서 진정한 역지사지를 통해 나의 부모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존재를 만났다.
물론 잃는 것도 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나에게 소중한 관계들을 다수 접거나 소홀하게 된다.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오래 마음 쓸 수 없어 자꾸만 뒤로 미루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접진 못하게 되는 마음도 동시에 존재해서 오늘,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떠오르는 숱한 얼굴들에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내일, 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보지 않는 나에게 내일을 그리고 미래를 기대해 보게 만든 존재기에 결혼의 필수적인 다음 단계로는 잘 모르겠지만, 나의 삶에 있어서는 꼭 필요했던 다음 단계이지 않을까, 아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