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自我 마주하기
"너는 너무 빨리 커버려서, 그게 늘 아쉬웠어."
완벽하게 정확한 딕션은 아니겠지만 이와 비슷한 맥락을 가진 문장을 엄마에게 처음 들었던 것은 언제인지, 사실 시점을 특정하긴 어렵다. 다만, 최근 책장 정리를 하다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학교 숙제 일환으로 엄마에게 받은 편지에서 비슷한 문구가 등장하는 것을 봐서는 그즈음이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어렸을 때는, 아니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문장이 나에게 갖는 의미는 여럿 있었다. 그만큼 내가 빨리 철이 들었고, 그래서 부모님에게는 마음의 부담을 좀 더는 자식이었을 수도 있고(경제적인 부분과는 별도로), 자식이라기 보단 가족 그리고 때때론 친구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존재였단 뜻이려니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와 보니 저 문장을 나에게 말씀하신 엄마에겐 그 정확한 의미를 묻지 않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만 30개월을 지나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압도적인 1위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어르신들은 다들 어디서 그 말을 배워오시는 건가 싶게 정말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지금이 제일 예쁠 때다."라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평생 할 효도를 이 맘 때쯤 다 한다." "이후로는 속 썩을 일만 남았다." 등이 있는데, 이제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어르신들의 라떼 이야기나 어설픈 훈계가 아니라 정말 사실인 것처럼 여겨져서 나는 지금의 아이를 더욱 예뻐하고 눈에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내게 최근 들어 슬금슬금 다가오는 한계점이 결국 어제 드러나면서 아이를 낳은 이후로 처음으로 느낀 '외로움'을 마주하게 되었다.
남편의 퇴근이 늦어 아이와 둘이 있는 저녁이었다. 양치를 시키고 재우려고 치약을 쌀알만큼 짠 칫솔을 오른손에 들고 아이를 부른다. 하지만 아이는 나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 위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장난감들을 하나씩 이부자리로 데리고 들어간다. 중간에 내 눈치를 간간히 살피면서, 평소 내가 허락하지 않는 행위인 것을 익히 알지만 내가 그 '행위'에 대해선 별 말 없는 것을 보고 허락이라 생각한 모양인지 신나게 장난감 셔틀을 하고 있다. 다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양치하자고 부르지만 아이는 셔틀을 마치고 장난감들과 함께 즐겁게 누워서 종알거리며 이야기 중이다. 그 때 갑자기 거실 매트 위에 주저앉아 있는 내 주변으로 외로움이란 감정이 밀려왔다. 먹먹함을 채 느낄 새 없이 아이를 데려다가 양치를 시키고 장난감을 제자리에 정리한 이후 아이와 함께 누워 깜빡 잠이 들었다. 집에 들어온 남편이 깨워 일어나서 마저 거실을 정리하면서 몇 시간 전 내가 느낀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알게 되었다. 그 감정의 기저에 깔려있던 생각의 의미는 더 이상 내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었구나 하고.
엄마도 그랬을까. 내가 더 이상 당신의 품 안의 자식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훌쩍 커버려서 혼자 1인분의 몫을 한다 느꼈을 때,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셨을까. 책장에서 발견한 편지를 엄마에게도 보여드렸는데 엄마는 찬찬히 읽으시더니 새로워하셨고, 어렴풋이 그 감정을 이해하겠지만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하셨다. 다만 이렇게 덧붙이셨다. "진심으로 느낀 것을 쓴 것 같은데?"
아이의 자아가 부쩍부쩍 자라나는 요즘이다. 말도 제법 잘 알아듣지만 아직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세밀히 표현하진 못해서, 스스로의 한계에 짜증과 울분을 부리기도 하고, 원하는 것이 제법 많지만 늘 부모의 선에서 잘려 나가는 것에 대해 불만을 여실히 표현하는 요즘, 난이도가 수직상승한 육아에 나는 쩔쩔매기 일쑤인데, 그러면서도 이 시간들이 나에게 주는 '돌이킴의 기회'임을 다시금 느낀다. 물론 순간순간은 그렇게 돌아보기 쉽지 않지만, 아이와 떨어져서 나만의 시간을 갖는 동안 한 번씩 풀어내면서 다시 아이를 마주할 때를 준비해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