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떻게든 아이에게 가르치려고 해 봤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처음으로 본 아이의 악마 같은 검은 아우라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집에 와서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 아이가 착하고 순한 성격이라서 그런가? 설마... 그 아이가 black이라서 그런가?’
‘착하고 순한 성격이기 때문에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더 못된 거야. 내가 사회에서 강약약강인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내 아이가 그런 애라고? 절대 안 돼.’
‘아니면 그 친구가 남들과는 다르게 생겨서? black이기 때문에? 내 아이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인종차별이라는 게 부모로부터 습득할 기회가 없어도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본능인 건가? 아니, 근데 심지어 너는 아시아인인데?’
다음 날 선생님께 “제 아이가 종종 다른 애들을 때리나요?”라고 물었을 때, 선생님은 그렇다고 했다. 전날보다 한층 더 절망적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를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폭력적인 아이’에 대해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다 그런다고, 점점 나아진다고 많은 글들이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엄마, 아빠를 때린다는 내용이었지, 친구를 때린다는 내용은 없었다. 내 아이만 이렇게 남을 때리는 안 좋은 버릇이 있나 싶고 오만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이후로 한동안은 아이를 더 단속하듯 지냈다. “오늘도 친구들이랑 잘 놀고, 친구 때리면 안 되는 거야. 친구야~ 사랑해~”라고 매일 말해줬다. 그리고 가끔 선생님께 물었다. “오늘 혹시 누군가를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죠? 제 아이가 혹시 좀 폭력적인 성향이 있나요?” 내가 계속 묻자 선생님은 말했다. “It’s okay. That’s what kids do.”
그래. 다 그렇게 크는 거구나. 내가 너무 아이를 단속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일이 있고 한 달 반쯤이 지났을까. 다른 아이 엄마를 통해서 들었다. 그날 그 아이의 눈가에 빨간 피딱지가 앉았더라고. 아이의 엄마가 굉장히 속상해했더라고.
너무 죄스러웠다. ‘폭력적인’ 아이를 둔 엄마라서 죄스러웠다. 아이의 폭력성을 내가 제대로 훈육하고 있지 못한 걸까 하는 죄책감까지 밀려왔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그 아이의 눈가가 괜찮아 보였기에, 선생님들도 괜찮다고 했기에, 내 심적인 당혹감과는 별개로 ‘그래도 작은 사고였겠거니.’하고 넘어갔었다. 친구 아이가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이 엄마가 속상해했던 것을 알았더라면, 아이 엄마에게 연고라도 사다 주고, 쪽지라도 남겨놓을 수 있었을 텐데.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어야 소용이 없으니, 그저 어린이집에 말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런 이슈가 있다면 다음에는 꼭 내게 말해달라고. 아이들이 다 그러고 큰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고, 내 아이가 혹여 누군가에게 맞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러나 모든 엄마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내 아들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싫다고.
그 뒤로 아이가 누군가를 때리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엄마, 아빠를 때리는 빈도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내 아이가 악마로 보였던 그 순간이 점점 희미해졌다. 요즘은 그 친구와도 아주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흐뭇하다. 다만, 아직도 인터넷에서 “아이가 친구한테 맞았는데 너무 화가 나요.”하는 글을 볼 때면 마음이 뜨끔해진다. 아이의 잘못이 곧 나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