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엄마 02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할머니는 여덟 아이를 키웠음에도 육아에는 소질이 없으셨던 모양이다. 할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때와 마찬가지로, 온 동네를 다 휘젓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는 오빠의 바짓단을 털면 모래 한 줌이 후드득 떨어졌고, 오빠의 손톱 끄트머리에는 새까만 때가 끼어 있었다. 지친 몸으로 퇴근한 엄마는 그걸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손주들을 조금 더 섬세하게 돌보기에는 할머니는 너무 나이가 들어 힘이 없는 게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는 오빠가 어떤 몰골을 하고 집에 돌아오더라도 별일 아니라는 듯 치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 또한 나는 특유의 기운 없음에서 발현되는 궁극의 여유이자, 할머니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직 애들이 어리니까, 곁에 할머니가 있으면 그래도 좀 낫겠지.’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우직하게 그저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것이 할머니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어린 내 눈에도 할머니가 우리를 돌봐 준다기보다는, 엄마가 할머니까지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할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돌아가시면서 할머니는 남겨진 자식 여덟 명을 홀로 부양했다고 한다. 김치공장이었던가를 다니며 치열하게 아이들을 먹이고 키웠다고 한다. 육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겁만 많던 시기, 아이가 신생아이던 그 시기에 주워들은 할머니의 육아 이야기는 참 새로웠다. 아이에게 보리차를 먹이자는 말에 내가 아직은 이르다며 짜증을 내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참 유난이다. 늬 아빠는 논에서 일하던 늬 할머니가 논밭에서 주워 온 지푸라기 끓인 물을 보리차처럼 먹고 자랐어.”
그게 할머니표 육아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저 굶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때깔 좋게 입혀 놓는 건 하나도 소용없어. 알아서 크는 것이지.’ 김치공장에서 젊은 시절의 에너지를 모두 소각해 버린 할머니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김치공장에서 젊음을 불태우는 할머니의 모습이 쉽사리 상상되지 않았다. 할머니가 느지막한 나이에 막내인 아버지를 낳았으므로 어릴 적 할머니는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오래 산 노인이었다. 무슨 행동을 해도 나무늘보처럼 굼떴고, 어떤 일에도 크게 동요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의 눈빛이 총명하게 반짝이던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핵교가 재밌냐잉? 핵교에서는 뭘 가르쳐주는디?”
너무나 포괄적인 질문에 놀라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수학 문제를 푼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한자를 배운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바른생활과 슬기로운 생활을 배우고 있다고 해야 할까? 사회과부도라는 책이 있는 데 그 책에는 우리나라와 온갖 세계의 지도들이 다 나온다고 말해야 할까?
“글씨 쓰는 것도 갈쳐주냐잉?”하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빛은 열여섯 소녀처럼 빛났다. 뭘 이렇게 당연한 것을 새삼스럽게 그런 눈빛으로 묻는 걸까?
“글씨도 배우고 숫자도 배우고 다 배우지요.”
“그려? 나도 가르쳐줘 봐. 여기, 여다가 할머니 이름 써 봐.”
집게손가락에 침을 함박 묻혀 검은색 수첩 표지를 걷어내고 속지를 드러내면서 할머니가 말했다.
내가 할머니의 이름을 모를 거라고 여겨서 시험을 하려고 하시는 걸까? 할머니의 성함을 알고 있던 스스로를 매우 뿌듯하게 여기며 할머니가 가리키는 곳에 할머니 이름 석 자를 썼다. 초등학교 2학년 받아쓰기 시간에 쓰던 것처럼 최대한 예쁘고 반듯하게 썼다.
“고기 그 밑에다가는 핵교서 배운다는 그 뭐시기 글자도 써 봐.”
“글자는 여기 수첩 안에 다 안 들어갈 것 같은데. 너무 많아서.”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가 글자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나는 도무지 무슨 글자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려? 그럼 그 숫자라는 것을 한 번 써 봐라잉.”
“어떤 숫자요? 우리 집 전화번호 적을까요?”
할머니가 소중한 수첩을 잃어버릴까 봐 수첩에 연락처를 남겨놓으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 그냥 숫자 배운다는 거, 그거 배운 대로 써 봐.”
숫자라는 것은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인데. 나는 할머니의 요구가 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의미가 담긴 특별한 숫자가 아니라 ‘그냥’ 숫자를 ‘배운 대로’ 써달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때는 몰랐다. 일종의 시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쉽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럼 그냥 1부터 9까지 적을까요?”
나는 할머니의 이름 석 자 밑에 1부터 9까지 가지런히 적었다.
보름쯤 지났을까, 할머니가 그 수첩을 들고 내게로 왔다.
“이거 좀 봐봐라. 이거 맞냐이?”
할머니는 힘없이 떨리는 손으로 느릿느릿 수첩의 마지막 장을 펴서 내게 내밀었다. 찰박. 집게손가락에 침을 흠뻑 묻히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수첩의 마지막 장엔 할머니의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이제 막 연필 쥐는 법을 배운 어린아이가 쓴 글씨처럼 꼬불꼬불하고 지렁이처럼 못난 모양이었지만 할머니의 이름이 맞았다.
김 재 희
“이게 내 이름이 맞냐?”
“네. 맞아요.”
할머니가 당신의 이름을 써 달라 부탁했고, 그것을 똑같이 따라 쓴 그 석 자가 할머니의 이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할머니의 확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중에 알았다. 할머니는 비뚜름하게 앉은 채 한 손에 당신 이름 석 자가 적힌 수첩을 쥐고 난해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한동안 말도 없이 바라만 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