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엄마 04
그날 우리 가족은 다 같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위급한 전화 한 통에 목적지를 돌리는 것은 우리 집에선 흔한 일이었다. 위급한 환자 앞에서 촌각을 다투는 것은 의사인 아버지의 의무였다. 그러나 그날의 환자는, 우리 할머니였다.
부모님은 나와 오빠에게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만큼은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다만 할머니를 잠깐 뵙는 것은 허락하셨다. 할머니는 기계 옆 병상에 누워계셨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으으- 으으-
신음하는 소리를 내는 것조차 너무 힘겨워 보이는 할머니의 마지막 소리를 나는 기억한다. 할머니가 그저 아픔 때문에 신음소리를 내뱉는 것인지, 아니면 아프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나이 든 노인이었지만 용감하고, 무엇에도 끄떡없고, 뭐든 견딜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짐승 같은 소리를 내뱉는 지경이면 그 고통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할머니의 고통을 끝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주 잘 알면서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린 나는 그 고통을 끝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병이라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면 절대 알 수 없을 테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힘든 일임은 분명하다. 투병기간 동안 할머니가 셋째 아들과 막내아들의 집을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직장을 다니면서 병든 시어머니를 간병까지 하기에 엄마의 몸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막내아들이 형제 중 유일하게 큰 대학병원이 있는 도시에 살고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셋째 아들네에서 막내아들네로, 막내아들네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셋째 아들네로, 계속된 투병기간 동안 할머니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녔는데, 어른들의 사정을 알 길이 없는 어린 나는 그런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병이 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처음으로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할머니가 셋째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서 나온 날이었다. 우리 집으로 오기 위함이었는지, 병원으로 가기 위함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큰아버지 집 대문 앞에 아버지의 승용차가 바짝 붙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큰아버지 집의 대문에서 현관문까지는 스무 걸음 정도면 갈 수 있었다. 그때 이미 할머니는 양옆에서 누군가가 단단히 부축한다고 하더라도 단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어른들은 할머니를 누운 그 상태 그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들것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들것이 될만한 무엇조차도 없었다. 어른들은 할머니가 깔고 누웠던 이불의 내 귀퉁이를 붙잡고 그대로 들어 올려 어찌어찌 힘겹게 대문간까지 갔다. 자동차 뒷좌석의 양 문을 모두 연 채로 한 명은 밀고, 한 명은 당기며 이불째 할머니를 뒷좌석에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어느 방향으로든 까딱할 힘조차 없던 할머니는 술 취한 사람처럼 당신의 모든 무게를 중력에 맡긴 채 그저 이불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할머니의 무게 때문에 물고기잡이 그물처럼 휘어진 이불 모양을, 그 위에 축 늘어진 할머니를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할머니가 그 순간을 인지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너무나도 심각한 고통에 맞서느라 어쩌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지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일어설 기력조차 없기에 누군가에 의해 들어 올려져야만 이동할 수 있다는 무력감, 심지어는 배변활동조차 기구와 간병인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것이었다. 그 순간 할머니의 눈을 보았더라면 할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때 나는 너무도 무서워서 할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할머니가 우리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나였다면, 이불 위에 무력하게 누워있는 것이 내 유일한 존재 방식이라면, 나를 들어 올리는 아들들의 주름진 눈을 마주 보기 어려웠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