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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초밥 Oct 28. 2023

아빠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어요

엄마는 케이크를 사러 갔어요

"아아빠아느으으응~ 아이슈쿠리므을 샤어 가써요오~"

"엄만케잌사러갔ㅇ!"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뒤에도 내 머릿속을 맴도는 그날의 언어가 있다.

오늘은 "아빠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어요"라는 책을 읽는 아이의 목소리이다.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내용이 메인이라서 "엄마는 케이크 사러 갔어요"는 부제처럼 잽싸게 덧붙인다. 부제는 큰 제목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의 절반만큼만 할애한다.


텅 빈 집을 청소하는 내내 그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린다. 잔디깎이 기계만큼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덜덜거리는 청소기 소리를 넘어서 아득히 들려오는 듯한 그 목소리를 음미한다.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집안일의 고단함을 달래는 노동요처럼.


아이가 6개월쯤 나는 곧잘 아이를 흉내 냈다.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홀로 보기 시작하면서 종일 우리 집을 울리는 '목소리'는 온통 나 하나의 것이었다. 아니면 아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나의 목소리이던가. 울음소리 말고는 낼 줄 아는 소리가 거의 없는 아이를 상대로 1인 2역을 거뜬히(그리고 꽤 즐기듯) 해내면서, 가끔은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어떤 목소리를 낼까 상상해 본 적도 있다. 물론 내가 흉내 내는 그 요상한 목소리는 아니겠지, 하고 말이다.


처음 아이의 목소리가 뜻밖의 노동요가 되어 등장했던 건 "거의"라는 낱말이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하려던 무렵이었던가. 엄마 아빠의 대화 중에 "거의"라는 단어만 나오면 잽싸게 "꼬으ㅣ!"하고 추임새를 넣는 거였다.

"어? 이거 치약 거의 다 썼("꼬으ㅣ!")어."

"치킨 거의 다 왔("꼬으ㅣ!")다."

엄마랑 아빠랑 대화하는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던 건지 정말 대단할 정도의 반사신경이었다. 그 추임새가 어찌나 귀여웠던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집안이 적막해지면 혼자서라도 열심히 추임새를 넣으면서("꼬으ㅣ! 꼬으ㅣ!") 걸레질을 했다.


그다음엔 나름대로 열심히 "바나나"를 발음하는 목소리 ("빠아~빠!")였고,  그다음엔 소화기 소리를 흉내 내는 "취이이이~!"였던가. 그리고는 "아빠 나가아!"도 있었고, "잘멋겠 드세요~"도 있었고 "Happy Happy Sleep~~~"도 있었고 "누가 내 침대에서 잠을 자요~"도 있었다. "아빠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어요" 이전에는 "떼구구르 굴러서 가ㅆ 쬬?"와 귀여워를 의미하는 "기워여~" 였다. 사실 이 중 "기워여"는 아직 진행 중이다.


지난번 북클럽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중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누군가 "지나고 나서도 자꾸 생각날 것 같은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이 행복인 것 같다"라고 답했다. 어머나, 그럼 난 거의 행복 중독 수준이 아닌가!

아이의 목소리가 꼬으ㅣ! 환청처럼 들리고, 가끔은 뭔가에 집중이 안될 지경이며, 금단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잽싸기 휴대폰을 뒤져 그 목소리가 담긴 영상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의 언어가 발달하면서 그날의 언어도 크게 발전 중이다.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제는 이야기로. 오늘은 "아빠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어요"이지만, 내일은 "루피는 힘들었지만, 친구들에게 쌘드윗치을 만들어 줘써요. 힝! 난 좀 들오갓 쉴게에~"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선배 엄마들이 말한다. 이때만큼 귀여운 나날은 다신 오지 않으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베스티는 37세인 아들과 32세인 딸을 둔 엄마뻘의 영어 선생님이다. 아들이 아들들을 낳고 나서도 베스티는 여전히 아들이 손자보다 어렸던 때를 기억한다. (지금은 37세인) 아들이 안전벨트에 앉기 싫어서 지었던 표정, 쇼핑몰에서 사람들에게 했던 귀여운 행동, 맥 앤 치즈를 먹을 때 표정을 어제 일처럼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니까 아마도 요즘의 나날이 내 미래에 가장 깊게 각인될 순간이 아닐까 싶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지나고 나서도 자꾸 생각날 것 같은 순간. 행복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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