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운다. 조막만 한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그 소리가 내 심장을 뒤튼다. 아마도 그 애의 주먹보다도 훨씬 클 내 심장이 빨래처럼 쥐어짜진다.
상상 속에서 나는 맥주 캔을 딴다. 어두운 곳에 가두어져 있던 거품이 내가 사는 이 집의 공기와 만나서 치익, 자유의 환호성을 지른다. 이게 내가 상상 속에서 맥주 캔을 딴 첫 번째 이유다. 그 속의 탄산처럼 내 가슴을 옥죄는 답답한 무언가도 치익, 날아가길 원한다.
아이의 목젖이 내 목을 조른다. 여태 자고 일어났으니 배가 고픈 걸까. 오늘도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는 대신 냉장고로 달려가는 걸 택한다. 무슨 문제일까. 뭐를 해주면 해결이 될까. 아이의 울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나는 또 무너지고 말 거야. 아이의 울음소리가 내 것이 될 거야. 아이 것보다 더 큰 울음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게 될 거야. 그러면 나도, 아이도, 누구도 위로받지 못하고 상처 입은 두 사람이 될 거야. 내가 두렵다. 나를 위해서, 아이의 울음을 그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우울한 엄마는 이기적인 엄마가 되어야 했다.
찢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달려와 아이는 보란 듯이 밥그릇을 엎는다. 보드라운 카펫에 따뜻한 밥 한 공기와 고기완자 한 덩어리가 못된 표정으로 떨어진다. 내 심장도 함께 내동댕이쳐진다.
나는 숨을 고른다. 밥그릇처럼 굴러 떨어진 내 인내심을 얼른 주워 담아 빗장을 걸어본다. 이 순간 내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온다면 그건 저 아이보다 더 큰 울음소리이거나, 야단치는 소리일 것이다. 둘 다 해본 적이 있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화가 나지만 참아야 했다.
여기 아이가 울고 있는데 화가 나는 엄마가 있다. 좋은 엄마라면 달려가 안아주겠지. 그러나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열 번 중에 두 번 아이를 안아 달랜다. 두 번은 더 큰 울음소리를 낸다. 두 번은 분에 못 이겨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아이를 훈계한다. 나머지 네 번은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내면서.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내 의식을 방해할 무언가를 애타게 찾으면서.
나는 회피하는 엄마다. 심장이 뜯기는 고통을 느끼면서 회피하는 엄마다. 아이가 쏟아내는 울음이, 그 감정이 내게로 와 증폭되는 과정을 오롯이 느끼면서 여전히 회피하는 엄마다. 그 순간 내가 가진 인내심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노력으로 몽땅 끌어다 쓰면서, 아이를 향해 두 팔 벌리지 않는 엄마다.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아도 결국 아이는 울음을 그친다. 애당초 해결할 수 없는 울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고 일어나 보니 놀이시간이 사라진 게 아쉬워서 그렇게 울었는지도 모른다.
이 때다. 내 안으로 끌어 모은 인내심을 밖으로 향할 때가 왔다. 인내심의 둑을 개방해 아이에게 묻는다. “어디가 아파?” 이 질문이 통하지 않는다면, 아이가 다시 울음을 이어간다면, 이미 흘러가버린 인내심을 다잡을 기회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응.”
“어디가?”
“요기.” 아이는 제 손가락을 이리저리 굴려보다 적당한 한 곳을 가리킨다. 엄살 단골 엄지 손가락이다.
“거기가 아팠어?”
“응.”
“엄마한테 와서 여기 아팠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응.”
“엄마한테 와서 여기 아파요, 밴드 붙여 주세요, 말할 수 있어?”
“응.”
아이는 금세 회복되었다. 그렇게 울더니 뒤끝도 없다. 나는 더는 말을 잇지 않는다. 내 마음이 난 자리를 뿌리째 뽑더니 혼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는가 보다. 내게 오더니 허벅지를 두어 번 쓰다듬는다. “미안해 미안해”
나보다 마음이 넓은 아이가 나에게 사과한다. 너는 한번 더 나를 못난 엄마로 만든다.
이번엔 진짜로 맥주캔을 딴다. 치익, 소리는 명쾌하지만 생각만큼 응어리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술기운이 올라 정신이 몽롱해지면 썩은 심장의 아픔도 흐릿해질지 몰라 계속해서 술을 홀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