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어른이 되는 밤

by 난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 정도로 고요했다. 퇴근길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자꾸만 멈칫했고, 마음은 가벼운 회전문처럼 제자리만 돌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어 도윤과 통화를 걸었다. 익숙한 신호음 끝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하루의 끝에 나를 붙잡아주는 유일한 닻처럼 다정했다.


“오늘 어땠어?”


“그냥… 조금 힘들었어. 별일은 없었는데, 마음이 좀 무겁네.”


도윤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괜찮아. 네가 힘들 땐, 그저 네가 느끼는 그 무거운 공기 속에 내가 함께 있음을 알아줬으면 해.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항상 같이 있을게. 어떤 형태로든.”


그 말에 나는 괜히 울컥했다.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같이 있을게’라는 그 다정함이, 내가 늘 원했던 위로였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더 자주 싸웠다. 별것 아닌 일에 날이 섰고, 불쑥 나가버린 말들이 도윤을 다치게 했다. “왜 그렇게 말해?”라고 묻는 도윤에게 나는 늘 “나도 모르겠어, 나도 내 말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라고 대답했다. 말로 다듬어지지 못한 마음이 자꾸만 뾰족한 혀끝에서 튀어나왔고, 도윤은 그런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는 늘 말했다. “나는 너를 고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네 곁에 있고 싶은 거야. 너는 괜찮아. 있는 그대로 괜찮아.”


나는 그 말이 처음엔 잘 믿어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내가 본 사랑은 부서지는 것이었고, 조용한 저녁조차 곧 다가올 폭풍의 전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항상 불안정한 균형 위에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함께 있는 법을 잊은 사람들이었다.


윤아는 오늘도 퇴근이 늦었다. 피곤한 얼굴로 들어온 그녀는 쇼파에 가방을 툭 던지고는, 조용히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묻는다.


“엄마, 아빠는?”


“방에 있어.”


윤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도 이 집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야 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윤아는 밝으려고 애썼다. 주말이면 작은 화분을 들여놓았고, 아빠의 웃음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끌어내기 위해 먼저 장난을 걸었다.


내가 본 윤아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사랑을 기대하고, 또 그 사랑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녀는 얼마 전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우리 집이 싫지 않아. 그냥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엄마는 요즘 무릎이 자주 아프다고 했다. 병원 진료를 미루며, 무언가 감추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빨리 병원 가봐. 진짜로.”


엄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엄마 아픈 거 몰라도 돼. 걱정말고 네 몸이나 잘 챙겨”


나는 그 말이 서운하면서도, 또 이해됐다. 엄마는 언제나 자기 마음을 감춘 채 살아왔고,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감추는 사랑은 때때로 상처가 된다. 나는 그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고 싶었다.


아빠는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꿈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그 흔적들은 점차 색이 바래고 있었다. 일터에서 그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그가 예전에 알고 있던 세계는 서서히 흐릿해졌다.


50을 훌쩍 넘은 나이가 되어버린 그는, 이제 과거의 청춘이란 단어가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지 못함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원하는 마음은 여전히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그는 묵묵히 일상의 작은 조각들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었다.


한때는 가능성으로 가득 찼던 그 길들이, 이제는 무겁고 낯설기만 해서, 그 길을 떠날 용기가 부족해 그는 그저 그 갈망을 삼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점 무기력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식탁 위에서만큼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농담을 건넸고, 내게 물었다. “요즘 도윤이는 잘 지내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아빠는 딸의 연애가 늘 멀고 낯설었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에서 나는 아빠의 애틋함을 느꼈고, 그게 서글펐다.


그날 밤, 도윤과 다시 통화했다. 각자의 집에서 이어폰을 낀 채,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윤이 말했다. “보고싶어.”


“나도야. 왜 때문인지 하루 종일 내 머리 위에 구름이 드리운 것처럼 축축했는데, 너랑 이렇게 통화하니까 좀 맑아지는 것 같아.”


“그 구름, 내가 걷어줄게. 빨리 만나자.”


나는 잠시 머뭇하다 도윤에게 말했다. “… 우리, 지금처럼만 지내자.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그냥 함께라면 좋아.”


그러자 도윤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평생 네 곁에서 너 보고싶어. 요즘의 나는 네가 어른이 되는 모습을 보고 있어. 너 누구보다 용감하고, 누구보다 다정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거든, 정말 멋진 사람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울음을 참았다. 아마도 그날 밤, 나는 비로소 믿게 된 것 같다. 내가 다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가족도 나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이 완벽하진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작은 목소리들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 나는 내일을 더 다정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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