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솔직히 눈에 띄지 않았다.
기계과 강의실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던 그는 까만 가디건에 흐릿한 얼굴, 그저 또 한 명의 이름 없는 남학생일 뿐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날, 교내 방송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어후, 여기선 튀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곳은 회색빛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옆 자리엔 피곤에 찌든 얼굴들이 늘어져 있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채 졸고 있었다. 공기의 결마저도 무겁게 가라앉은 곳. 그 틈에서, 그는 특별할 것도 없이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고작 며칠이 지난 뒤, 그 ‘조용함’이 어떤 울림을 가진 것인지 나는 뼛속 깊이 깨닫게 되었다.
MT 첫날밤이었다.
낮에는 어색한 자기소개와 단체 게임이 이어졌고, 밤이 되자 술자리가 차려졌다. 교수 한 명이 함께 한 자리였다. 술이 한순간에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자, 뻔한 농담들이 오가더니, 결국 날카롭고 낡은 말이 나왔다.
“여학생이 별로 없네, 안 되겠네. 이럴 땐 우리 예쁜 학생이 나서야지. 나와서 노래 한 곡 해줘.”
내가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
“교수님, 전 괜찮아요. 다음에요.”
겉으론 웃음소리가 퍼졌고, 분위기는 일단 그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마른풀 위에 불씨가 튀어 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웃고 있는 얼굴들 사이로 흘끗거리는 시선이 찝찝하게 스쳤고, 누군가는 내게 술을 더 따랐다. 나는 그 술을 조용히 책상 옆으로 밀어놨다.
새벽 두 시가 넘었을 때였다.
숙소 복도는 이미 취한 사람들로 너절해졌고, 방 안에서는 코 고는 소리와 얕은 수다가 섞여 있었다. 나는 구석 이불 위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쿵.
덜컥.
술에 취한 선배 한 명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눈은 풀려 있었고, 입가에는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어지럽게 얹혀 있었다.
“아, 여기 있었네? 낮에 왜 그렇게 튕겼어? 다들 너 예쁘다 그러던데.”
나는 몸을 움츠렸다. 누군가 곁에서 나를 툭 건드렸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방 안의 공기가 단단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모두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 문 뒤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들어왔다. 조용하게, 아주 조용하게.
“선배, 그만 들어가요.”
낮은 목소리였다. 마치 오래된 LP판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거슬리지 않고 단단한 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도윤이었다.
그는 다가오지 않고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선배의 그림자를 덮었다.
“지금 이건 장난도 아니고, 다들 불편해요. 나가주세요.”
선배가 그를 노려봤다.
“뭐래, 너 뭔데? 나랑 친해?”
하지만 도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작은 미간의 주름 하나로 상황을 정리했다.
“선배, 내일 아침 되면 기억도 제대로 못하실 텐데 책임지지 못할 행동 하지 마세요. 지금 나가세요. 방으로 모셔다드릴게요. 들어가서 쉬세요.”
그 단호함이 방 안 공기를 바꿨다. 잠들었던 사람들마저 그를 쳐다봤다.
선배는 도윤과 나를 번갈아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결국 도윤을 밀어내고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도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듯이 문 밖의 경계를 넘어서서 안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 모습은 마치 문지방을 넘기 전, 그 사이에 서 있는 것처럼 어색하고 신중했다.
“괜찮아요?”
그 한마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이 다시 떠오를까 봐 두려웠다.
“죄송해요. 이런 분위기일 줄은 몰랐어요.”
그의 말투는 지나치게 조심스럽지 않았지만, 그 속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동정도, 연민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도 너랑 같은 자리에서 불편했다’는 연대감 같은 것. 그건 내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 그의 얼굴이 다르게 보였다.
회색 속에서 분명 회색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안개였고, 그 안에 단단한 형태가 숨어 있었다. 그는 결코 화려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안개를 걷어내는 사람이었다.
내 마음의 한 귀퉁이, 늘 비워져 있던 그 자리에 도윤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아무 소리도 없이. 그러나 너무도 분명하게.
MT에서 그는 누구나 할 법한 선택을 했을 뿐일지 모른다. 약한 편에 서서 말 한마디를 건넨 것, 어쩌면 그저 도윤다운 정의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부터였다. 말없이 건네는 시선, 같은 자리에 머무는 발걸음, 느리지만 확실하게 가까워지는 거리. 함께 걷고, 저녁을 먹고,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나는 자꾸 그를 신경 쓰게 되었다. 무언가를 시작하자고 말한 적은 없지만, 우리 사이엔 이미 말로 설명되지 않는 기류가 흘러가고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도망칠 수 없게.
그렇게 4월 초,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좋아하는 거 맞느냐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도윤은 망설였다. 늘 조심스럽고, 섣부른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의 당돌하고도 진심 어린 물음 앞에 그는 처음으로 웃으며 말했다.
“좋아해. 내내 네 생각했어.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연애가 늘 순탄했던 건 아니다. 나는 자라온 환경 탓에 때로는 거칠고, 종종 서툴렀다. 그저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괜한 날을 세웠고, 불안은 늘 내 입술보다 앞섰다. 때로는 그 말들이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나는 쏟아냈다. 감정이 휘몰아치던 순간들에, 도윤은 그저 내 말을 끝까지 듣곤 했다.
“너 바보야 ? 왜 그렇게 참기만 해?” 하고 내가 물으면, 그는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가 날 미워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한 번은 집 근처 작은 카페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봄이 저물어가는 저녁, 창밖을 보던 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이 거칠까. 나도 나한테 질릴 때가 있어.”
그는 내 손을 조용히 잡고 말했다.
“말투보다 마음이 중요해. 너는 늘 진심이잖아. 진심을 다해서 살아가는 사람. 그게 난 좋아. 나는 널 알아.”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억지로 뭔가를 고치려 애쓴 게 아니라, 그가 준 믿음이 내 안에서부터 나를 다독이며 길들이기 시작한 거였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주말이면 전철을 타고 나갔다. 예컨대, 동인천의 헌책방 골목을 걷던 날. 나는 무심히 표지가 마음에 드는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었고, 그는 그것을 아무 말 없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카페에서, 나는 그 시집의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 뭔가 너 같아.”
또 다른 날에는 낡은 필름카메라를 들고 종로에 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나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바람 부니까, 머리카락이 다 엉키는 기분이야. 짜증나.”
도윤은 웃으며 카메라를 들었다.
“그 머리 그대로 찍을게. 너 지금 충분히 예쁘기만 해.”
가끔은, 내가 너무 서투른 탓에 도윤을 지치게 만들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된 순간부터, 너의 모든 결을 함께 안아줄 준비를 했어.”
나는 생각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사랑이 내게 자주 불안정한 모습으로 찾아왔을 뿐이었다. 도윤은 처음으로, 사랑이 어떤 고요함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준 사람이었다. 요란하지 않았지만, 단단하게 마음을 바꾸는 사람.
그날 밤,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도 표현도 잘 못하고 투정만 부리고 … 참 못났지?’
곧 답장이 도착했다.
‘아니. 오늘도 너는 진심이었고, 그게 나한텐 제일 예뻐. 나는 다 알 수 있어.’
나는 휴대폰을 가슴에 꼭 안았다. 조용한 밤이었다. 그 밤, 나는 처음으로 믿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예쁜 사람’ 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믿음 하나가, 아주 천천히, 나를 바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