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집이 된 사람들

by 난화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해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한 계절, 나는 작은 식탁 위에 흰 접시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 위에는 도윤이 좋아하는 마들렌이 두 개, 그리고 우리가 함께 고른 회색 머그잔에 따뜻한 홍차가 담겨 있었다. 여전히 바쁘게 일하고 있지만, 퇴근 후 도윤과 나누는 이 조용한 시간은 이전과는 다른 평온함을 선물해줬다. 우리가 만든 이 집은 크지 않았지만, 날마다 서로의 마음을 덧대며 넓혀가는 중이었다.


결혼식은 따뜻한 봄날에 조용히 치렀다. 도윤은 여전히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고, 나는 여전히 그가 내게 처음 손을 내밀었던 날을 기억했다. 나의 말들이 너무 날카로웠고, 내 마음이 너무 낯설던 시절, 그는 물러서지 않고 내 앞에 있어주었다. 그의 그런 태도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함께’의 의미를 배워갔다.


윤아는 나보다 조금 먼저 결혼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남편은 내 직장 동료였다. 나는 처음엔 그저 둘이 좋은 친구가 되길 바랐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며 조심스럽게 사랑을 키워갔다. 윤아는 결혼식 전날,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언니, 나는 이 사람이랑 살아도 될 것 같아. 언니 덕분에 좋은 사람 만났어. 나 진짜 잘 살아볼게.”


그 말에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자매는 너무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지켜야 했고, 가끔은 부모의 감정을 대신 감당하느라 너무 어른 같기도 했다. 그런 우리 둘이 이제는 각자의 집을 마련해, 자신이 믿는 다정함과 사랑을 지켜가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부모님도 변했다.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아빠는 말보다 행동이 서툴렀고, 엄마는 혼자 감정을 삼키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나와 윤아가 집을 떠난 후, 그들 사이에는 조용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아빠는 작은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고, 엄마는 그 옆에 앉아 바느질을 하며 봄볕을 맞곤 했다.


우리가 함께 모인 어느 가을 저녁, 엄마는 손수 만든 깻잎김치를 내어주며 웃었다.


“도윤이 이거 제일 좋아한다며? 엄마가 해놨어.”


아빠는 도윤의 손에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우리 딸, 네 덕에 웃는 날이 확실히 많아졌어. 고맙다.”


나는 그 순간, 부모님도 서로를 다시 배우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린 시절의 불안과 다툼이 그들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랑이 모자랐던 게 아니라,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밤, 도윤과 함께 산책을 하던 중 나는 말했다.


“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집이라는 게, 그냥 벽과 지붕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려는 마음이란 걸. 우리, 그런 집이 됐으면 좋겠어.”


도윤은 내 손을 꼭 잡았다. 말 없이, 아주 깊이 공감하는 눈빛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아주 평범하지만, 그 평범함 안에서 매일같이 새로이 태어나는 다정함을 배우고 있었다.


윤아는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작은 고민을 털어놓는다. 육아가 쉽지 않다거나, 가끔 남편과 말이 어긋난다거나. 하지만 그녀는 매번 웃으며 덧붙인다.


“그래도, 언니. 우리 어릴 때처럼은 안 살잖아.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잘 해내고 있는 거야.”


나는 그녀가 기특했고, 그녀 역시 나를 대견해했다. 이제 우리 모두, 각자의 사랑과 일상 속에서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어느 저녁, 다시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식탁 위로 퍼지고, 윤아의 아이는 재잘재잘 하루를 쏟아냈다. 엄마는 작은 숟가락으로 반찬을 아이 그릇에 나눠 담았고, 아빠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속도로 새로운 계절을 건너고 있다는 것을. 과거는 여전히 우리 안에 눌어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더는 내일의 발목을 붙들지 않았다. 제 자리에 뿌리내린 감정들, 제 몫의 사랑들이 조용히 피어나는 중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의 다툼 앞에서 주먹을 움켜쥐고 숨죽이던 아이가 아니었다. 윤아 역시 언니의 어깨에 기대어 울던 작은 아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상처를 어루만질 줄 아는 어른이 되었고, 서로의 삶을 조용히 응원하는, 그런 가족으로 남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결국 모든 것을 치유했느냐고.


나는 그 질문 앞에 잠시 침묵한 뒤,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라고. 그것은 시간이 한 일이 아니라고.


우리가 끝내 서로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상처 주고, 때론 등을 돌리면서도, 다시 마주 보고, 다시 손을 내밀고, 끝내 사랑하는 법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었다.


상처 위에 다시 피어난 이름이었고, 부서진 마음들 위에 쌓아 올린, 가장 오래된 집이었으며, 누구도 방황하지 않을, 우리의 최초이자 마지막 고향이었다.

이전 06화5장. 어른이 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