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우유

by 난화

편의점 불빛 아래

아빠의 주머니 속에는 늘

말 없는 바나나우유 하나가 있었다.

뚱뚱하고 노란,

말보다는 둥근 캡으로 닫힌 마음.


“마셔.”

그 한 마디에 실려 있던 계절들.

고단한 하루의 쓴맛은

노란 단맛 속에 묻혀

조금은 참을 만해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우유는 내가 아니라

아빠 자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걸.

하지만 괜찮았다.

사랑은 종종 엇갈려도

그 끝엔 닿는 법이니까.


엄마는 언제나

그 우유를 냉장고 맨 앞줄에 놓아두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차가운 질서 속엔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어릴 적엔 그저 맛으로 삼켰지만

이제는 안다.

그 노란빛은 울음을 참고 삼킨 날들의 색이었다는 걸.

하루치의 용서, 하루치의 고백,

그리고 아주 작고 부드러운 화해.


뚜껑을 열 때 나는

자꾸만 지난 시간을 연다.

비명 대신 웃음으로 덮은 저녁들,

무릎 아래 웅크려 있던 어린 나,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조용한 바나나우유 하나.


오늘도 나는

그 둥근 병을 손에 쥐며

조심스레 마음의 뚜껑을 연다.

사랑이란,

때론 그렇게 마시는 것이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그러나 오래도록 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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