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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Apr 04. 2024

다 큰 어른의 알림장

요즘은 어린이집을 다녀도 어플로 알림장이 온다. 하지만 내 또래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보통 알림장을 초등학교 재학 중에 처음 접했다. 중학생이 되면 알림장을 쓰는 것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닌 본인의 몫이다. 초등학생일 때처럼 알림장을 보고 배껴쓰라는 사람도 없고, 매 과목마다 선생님이 달라 담임선생님이 챙겨줄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알림장을 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중학생이 되면 알림장이라는 개념은 서서히 잊혀지게 된다.


나 역시도 중학교 재학 중 알림장을 만들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저 새로운 환경과 새로 만난 친구들을 사귀며 적응해 나가는 것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학기 첫 오리엔테이션부터 구매할 것들이 많았는데 다행히 포스트잇이 있었다. 그곳에 준비물을 적어 플라스틱 필통에 붙여두었다. 이런 일들을 반복하다 보니 포스트잇을 잃어버리거나 필통 속 포스트잇의 존재를 잊고 준비물이나 숙제를 챙기지 못한 일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쉬는 시간 10분 만에 다른 반 친구에게 빌리거나 숙제를 베끼곤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어김없이 준비한 포스트잇에 과목별 준비물을 적었다. 하교 후 내가 좋아하는 문구점으로 갔다. 샤프, 볼펜, 지우개, 자, 볼펜 등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필요한 것을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내 마음에 쏙 드는 노트를 발견했다. 노트보다는 수첩에 가까웠다. A5사이즈의 반 만한 크긴데 스프링이 위쪽에 있었고 미키마우스 그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걸 꼭 사고는 싶은데 필기 공책으로 쓰기엔 불편했다. 우선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대책 없이 구매해서 집으로 갔다. 새로 산 노트를 하나씩 펼쳐보고 펜도 마음껏 감상하다 가방에 넣어뒀다. 잠이 들 때까지도 미키마우스 노트를 어떤 용도로 쓸까 고민을 한참 했다. 하지만 용도를 정하지 못한 채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다음 날 어제 수업이 없던 과목의 준비물이 또 생겼다. 준비물을 포스트잇에 적다가 갑자기 미키마우스 노트가 떠올랐다. '앞으로 이 노트에 적으면 되겠구나' 싶어서 당장 실행에 옮겼다. 나중엔 그 노트에 준비물, 숙제, 수행평가, 시험 범위 등의 내용이 쌓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고등학생 시절 내내 숙제를 밀린 적이 없었고 친구들도 항상 나에게 시험 범위 등을 묻곤 했다.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되었다

취업을 하고 사무직으로 일하며 전화로 오는 업무를 기억하고 처리하기 위해 포스트잇에 적고 붙였다. 고등학생 시절의 미키마우스 노트는 잊어버린 채 그렇게 시간이 흘러 2번째 직장에 이직했다. 그곳에 나에겐 조금 특별한 사람이 있었다. 팀장님이셨고 여성분이셨다. 젝스키스의 팬이었는데 최근에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셨다. 덕질을 위해 예쁜 노트에 포토프린터로 사진을 뽑아 붙이기도 하고 그곳에 글을 쓰기도 하셨다. 알고 보니 팀장님도 문구류를 좋아하셨다. 마침 회사 앞에 2층짜리 대형 문구점이 있어서 점심시간이면 문구점에 들러 구경하거나 필요한 것을 구매하기도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점심을 먹고 문구점에 갔다. 나는 그곳에서 미키마우스 노트를 발견했다. 잊고 있었던 나의 알림장이 떠올랐다. 일단 무작정 구매했다. 그리고 즉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의 효율이 높아졌다. 그렇게 팀장님이나 사장님께서도 내게 모르는 부분, 깜박한 부분, 중요한 부분 등을 물어오기 시작했다. 이는 연봉협상에서 큰 역할을 해주었다. 단순히 메모를 실천했는데 업무 성과가 높아져 작지만 경제적 발전까지 함께 이루었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더 이상 알림장은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도 알림장 같은 존재가 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역할은 아주 다르지 않다. 오늘의 할 일과 일정 그리고 하루의 소소한 일을 적는다. 어려서부터 키워온 기록 근력 덕분에 지금은 어렵지 않게 꾸준한 기록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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