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스파 Apr 20. 2024

재미있어서 재미있다.

자기 암시가 주는 행복

“힘들지 않아?”

“아뇨, 재밌습니다.”


머리가 까맸던 시절, 몇 번의 이직을 통해 나에게 맞는 직장을 찾은 후 일상은 매우 평화로워졌다.


주어진 일이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를 정도로 수없이 쏟아지는 업무에, 새벽 일하러 나오신 청소부 아저씨를 보며 퇴근하는 날이 다반사였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자부심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일이 많다 해도 공휴일은 칼같이 지키고 시간 외 근무 수당은 물론, 교육이라도 있는 날에는 별도의 수당을 챙겨주기도 해서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업무가 밀려있는 다른 선배들을 위해 방해되지 않게 도울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대신 처리해 주고, 별도의 공장을 가지고 있어서 힘쓸 일이 많았던 터라 사무직임에도 불구하고 생산직 직원들과 함께 열심히 땀을 흘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같은 건물에서 근무했던 계열사 직원들의 일까지 도와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선배도 자기의 일을 시키지 않았고, 생산직 직원들도 이 친구가 왜 여기서 짐을 나르고 있는지 의아해하긴 했지만 그저 열심히 바쁘게 하루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당시엔 가득했었다.  

    

일 년 정도 지난 후부터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힘들지 않아?”

“아뇨.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괜찮다고 대답을 했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서 괜찮다는 대답은 그 속뜻이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선밴데 어쩔 수 없잖아요.”, 

“괜찮은지 묻기 전에 일을 주지 말던가.”, 

“그럼 괜찮다고 하지 힘들다고 합니까.”처럼 듣는 이에겐 다른 뜻으로 들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괜찮다는 대답 대신 “재밌습니다.”로 시나리오를 바꿔 대답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윗분들 귀에도 들어갔는지 나는 감사하게도 최소 진급년수에 맞춰 착착 진급을 했다.

조금씩 더 높은 관리자의 위치에 올라가서도 여전히 짐을 나르고 다른 업무들을 도우며 습관적으로 재미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진짜 내 일이 재미있다.’


수년간 재미있다고 얘기했던 것들이 이제는 자기 암시가 되어 정말로 재미있게 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인데, 사실은 직급이 올라가며 일도 많아지고 책임의 한계도 높아져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경우가 많았지만 스스로에게 재미있다고 걸었던 최면을 이기지는 못했다.     

 

조금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서는 회사의 보수적인 규칙 두 가지를 바꿨는데, 

하나는, 친가와 외가의 경조사 휴일과 경조사비가 달랐던 것을 친가에 맞춰 통일시킨 것

다른 하나는, 손님이 왔을 때 여직원이 타던 커피를 직급에 관계없이 남직원이 타게 한 것이다.


간부가 되었을 때에도 막내 직원의 손님이 오면 직접 커피를 타서 드리며 훌륭한 직원이라고 칭찬을 하고 나왔고,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직급은 낮지만 신뢰받는 직원과 대화를 하고 있음을 느끼게 돼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곤 했었다.  스스로의 역할과 결과가 더 만족스럽게 바뀌면 그들도 재미있음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직장을 다니며 유일하게 재미있지 않았던 날은, 

사무직/생산직 모든 직원들과 손 붙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나의 퇴사 날이었다.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초등부터 고등까지 다양하게 있는지라 주말도 없이 한밤중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일상이 가끔은 벅차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래도 누군가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나는 늘

“재미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자기 암시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렇다.

저학년 꼬맹이들에게 90도로 인사를 하고, 수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또 수고 많았다고 배꼽 인사를 건네는 원장인데, 공부하겠다며 쫄쫄거리고 다니는 어린 친구들을 보면 참 기특하고 귀엽고 예쁘다.

또, 중고등 아이들과 부모님 얘기, 친구 얘기, 꿈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고 있노라면, 내 살아온 이야기가 좋은 대답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들도 많음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니 나의 일상이 재미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가의 이전글 우리에겐 육군/해군/공군, 그리고 청군과 백군이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