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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몰라 Dec 19. 2023

이렇게라도 잘하고 싶었어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가방만 던져두고 다시 나가는 딸들을 향한 엄마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의 교육열은 남달랐다. 대학 생활을 해보지 못한 자신과는 다른 딸들의 모습을 기대하며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가르쳤고, 책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을 꽂아 놨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내가 알아줄 리 없다. 책을 펴면 눈이 스르르 감겼고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 그래도 시험 기간이 되면 벼락치기로 훑어보기는 했다. 엄마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왔을 뿐.

 어느 날 갑자기 ‘1등’이라는 타이틀이 욕심이 났다.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저분한 책상을 정리했고 노트와 다양한 색상의 펜을 준비했다. 깔끔하고 보기 좋게 교과서 내용 정리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교과서를 읽고 중요한 내용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글자 하나라도 맘에 안 들면 과감히 노트를 찢어 버렸고 다시 적었다. 공부하려 했던 건지 예쁜 노트 만들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그렇게 적기만 하다가 시험 기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장은 남겨둔 채.

 정리한 노트를 천천히 살펴봤다. 펼쳐보지도 적어보지도 못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시험 문제가 나오면 어떡하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커닝해 볼까? 선생님께 걸리면 어떡해. 창피하잖아. 아니야. 괜찮아. 딱 한 번이잖아.’ 천사와 악마가 한참 싸웠다. 악마의 손을 잡기로 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다들 조용히 앉아 시험 준비 중이었다. 조심스레 전과를 펼쳐 잘 보이도록 책상 서랍에 넣었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선생님께서 나눠주신 시험지를 받아 들고 문제를 살폈다. 나왔다. 나올까 봐 걱정이었던 부분에서 출제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손에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다른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머리가 하얘졌다. 큰일이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마음의 진정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심장은 안정감을 되찾았다. 집중하려 노력했고 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마지막 문제를 남겨놓고 고민했다. ‘답을 쓸까? 쓰지 말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친구들은 시험지에 집중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계셨다. 책상 서랍에 손을 넣었다. 시험 시작 전에 넣어둔 전과를 슬쩍 몸 쪽으로 당겼다. 답이 보인다. 그대로 적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시험 결과가 나왔다. 3등이다. 그 문제를 틀렸어도 3등이었다.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걸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찝찝한 마음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지만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일기장을 펼치고 연필을 들었다. 이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매주 선생님께 제출해야 하는 일기장을 통해 나의 잘못을 알리고 용서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쓰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또 나를 속이는 일을 선택했다. 내가 커닝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뒤로하고 1등을 한 친구가 커닝한 것처럼 쓰고 말았다. 거짓말로 용서를 바랐다.   

 


1993년 7월 1일

효주는 시험을 볼 때 전과를 보고 한 것 같았다. 확실히는 잘 모른다. 내가 지우개를 떨어뜨렸는데 주우려고 했다. 그런데 효주의 자리에 떨어져 있어 좀 주어달라고 하자 효주는 무엇인가를 책상 서랍에 넣어 놓고 지우개를 줍고 다시 책상 서랍에 손을 집어넣는 것을 보고 또 꺼내더니 엎드려서 넘기는 소리가 났다. ‘내가 잘못 봤나?’


 

 선생님은 알고 계셨을까. 일기장에 적혀있어야 할 빨간색 글씨가 없었다. 솔직하게 쓰고 털어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막상 진실을 밝히려고 하니 혼이 날까 두려웠다. 두려움을 피하고자 거짓말을 택했다. 불편함은 배가 되었다. 그날의 기억은 내 마음의 짐이 되었다. 답을 보고 적어냈던 것보다 거짓으로 진실을 덮었던 그 수치스러운 행동이 종종 나를 괴롭혔다. 

 이 글을 작성하던 날,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가 받아쓰기 시험을 보고 온 날이었다. 나는 바르게 듣고 쓰기 잘하고 왔는지 딸에게 물었고 아이는 다 맞았다고 답했다. 어제 열심히 연습한 결과라고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칭찬에도 별 반응이 없던 아이가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열었다. 

 “엄마, … 사실… 정답지 보고 써서 다 맞은 거야. 틀리기 싫어서 정답지 보고 썼어.”

 놀랐다. 괜찮다고 다음부터는 정답지는 보지 말자고 말했지만,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엉켜있었다. 하필 내가 커닝하고도 솔직하지 못했던 잊고 싶은 과거를 적어 내려가던 날, 나의 아이가 처음으로 커닝하고 온 날이라니. 운명의 장난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법한 실수였다. 하지만 그 실수를 대처하는 행동은 전혀 달랐다. 난 거짓을 고했고 나의 딸은 진실을 고했다. 아이에게만큼은 당당하고 싶었다.

 “엄마도 학교 다닐 때 시험 잘 보고 싶어서 책 보고 쓴 적 있었어. 그런데 마음이 너무 불편한 거야. 그 뒤로는 모르는 문제는 그냥 틀리기로 했어. 정답지 보고 썼다고 솔직하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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