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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몰라 Jan 30. 2024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

 오늘도 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만해!”

 있는 힘껏 외치고 핑 도는 느낌이 들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목 놓아 울었고, 그 울음으로 호흡 곤란 증상이 나타났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단 말인가. 숨이 가빠지면서 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몸은 굳었고 숨은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저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릴 뿐. 

 몸이 굳은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갔고 의사 선생님은 물었다.

 “혹시 갑작스럽게 놀라거나 마음이 힘든 일이 있었나요?”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싫어서 소리 지르다가 이렇게 된 거라고…. 

 

아빠가 전역을 준비하면서 건강검진을 했고, ‘위암’을 판정받았다. 건강관리는 누구보다 잘했던 아빠였기에 충격이었지만 잘 회복될 거라 믿었다. 우리 아빠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믿음은 옳았고 아빠는 해냈다.

 아빠는 완치 판정을 받자마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런 아빠의 뒷모습은 멋졌다. 해보고 싶은 공부가 있다며 집 근처 대학교 평생교육원에 등록하셨다. 책상 앞에 앉아 파워포인트 책을 펼쳐놓고 마우스를 쥐고 있는 아빠의 손은 빛났다.

 그러던 어느 날, 따뜻했던 공기는 차갑게 변하기 시작했고 엄마도 아빠도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필요한 대화만 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휴, 또 싸웠구먼. 저러다 또 언제 그랬냐며 풀리겠지.’

 예상은 빗나갔다. 생각보다 길어졌고 난 그 분위기를 이겨낼 힘이 부족했다. 동생들을 시켜 왜 저러는 건지 알아보라 했다. 싸움의 원인은 아빠의 바람.

 “뭐? 아빠가 바람? 돈 없는 유부남을 좋아하는 여자도 있어?”

 웃어넘겼다.

 엄마는 그러지 못했다. 아빠의 핸드폰을 검사하기 시작했고, 이년들의 말이 무슨 뜻이냐고 동생들에게 물었다. 엄마가 칭하는 이년들은 평생교육원에서 아빠와 함께 공부하면서 같은 조가 된 사람들이었다. 아빠를 제외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엄마는 요즘 연금 받는 남자한테 들러붙는 여자들이 많다며 이 여자들도 그런 거라고 확신하며 말했다. ‘뭐? 엄마, 제발….’ 같은 여자로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들뿐 아니라 30년 함께 살아온 배우자를 의심하며 잠잠했던 이 집안을 들쑤시는 엄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동생들을 데리고 평생교육원 앞에서 아빠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밀어냈고,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더 다가갔다.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뿐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둘 중 한 명이 죽어야만 끝날 것 같았다. 엄마에게 말했다.


 “차라리 이혼해.”


 엄마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했지만 진심이었다. 다섯 명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라 생각했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부모님은 이혼하지 않았고 아빠의 공부에 대한 마침표로 휴전 상태가 되었다. 아빠의 포기가 마음 아팠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엘라는 공부를 더 하겠다고 미국으로 떠났고, 가비는 학교 앞 가까운 곳에서 살겠다며 수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2층에는 나 혼자만이 있다. 하루쯤 청소기를 돌리지 않아도 샤워를 오래 해도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간섭도 없는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을 때 창문을 통해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이 동네는 조용할 날이 없구나. 우리 집도 한창 시끄러웠지. 굿이라도 해야 하는 동네인가. 어? 익숙한 목소리.’ 

 그랬다. 우리 부모님의 목소리였다. 엄마의 목소리는 원래 컸기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빠의 언성에 놀랐다. 아빠의 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닫힌 창을 열고 싶었지만, 열려있는 창마저 닫아 버렸다. 컴퓨터를 켜고 ‘록’ 카테고리에 있는 음악을 찾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평소에 즐겨듣지도 않던 시끄러운 음악이 부모님의 목소리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날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듯 웃다가 울었고, 울다가 웃었다. 오락가락하는 엄마의 기분에 따라 내 마음도 변덕스럽게 바뀌었다. 아침마다 엄마의 기분을 살피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내려왔니? 얼른 들어와서 밥 먹어.”

 엄마가 부드럽게 말하는 날에는 내 마음이 진정되었고 엄마 아빠와 마주 앉아 식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릇을 식탁 위에 툭툭 던지는 엄마의 손길에 저 그릇이 깨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불안한 날이면 조용히 앉아 대충 먹고 나와야 했다. 그렇게 먹은 밥 한 숟가락은 나의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소리 내어 울고 나면 속이 풀릴 것 같은데 그러지 못했다. 내 눈이 눈물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한결 나아질 것 같은데 그럴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엄마가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웃으며 이야기하다 갑자기 눈빛이 싸늘해지고 말투가 변하는 엄마의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것 같았다. 조울증 같았다. 동생들에게 연락했다. 엄마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알면서도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 엄마를 모른 체 했다. 어차피 우리가 하는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오로지 옆에서 묵묵히 버티고 있는 아빠가 혹시나 스스로 삶을 놓아버릴까 무서웠다. 엄마의 마음은 단 한 번도 살펴볼 생각을 못 했다. 

 아빠 편에 서서 엄마를 공격했던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내 삶에서 죽지 못해 살았던 기간으로만 내 기억에 남아있다. 이 싸움이 끝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고, 이 마음이 보이지 않는 신에게 전달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 순간 끝났다. 내 기도의 힘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뒤늦게 알았다. 그때 우리 엄마는 갱년기였다는 것을. 


 놀이터 벤치에 앉아 친구들과 노는 딸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함께 앉아있던 딸 친구의 엄마가 말했다. 

 “나 요즘 이상해요. 왜 이렇게 덥고 짜증이 나는지.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게 꼭 갱년기 같아요.”

 “에이. 무슨 벌써 갱년기에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 나이를 계산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켜고 찾아봤다. 

 ‘40대 중후반에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3~5년간 지속될 수 있으며, 20% 정도의 여성은 증상이 좀 더 심하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증상으로는 안면홍조, 피로감, 불안감, 우울, 기억력 장애 등….’

 읽어 내려가면서 10여 년 전 우리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십 대였던 엄마가 오십을 앞둔 시기. 툭하면 덥다고 했고 별거 아닌 일에도 짜증 냈다. 하루에도 감정이 수십 번 변하는 엄마는 더 이상 생리대도 찾지 않았다. 호르몬 변화로 힘들었던 여성을 정신 나간 미친년 취급했다. 엄마를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았다. 

 몰랐다. 같은 여자로서 너무 무지했다. 엄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팠고, 차라리 엄마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우리 엄마는 정말 이기적이고 본인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나였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도 딸도 그 누구도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우리 엄마 너무 힘들었겠다.

 “좀 더 일찍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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