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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바람 Mar 30. 2024

아이들은 천사 같은 선생님을 왜 미워하는가

악마 선생님의 인기가 더 많을 수 있다

 어제는 아이들에게 정말로 빡쳤다. 워싱턴(가명) 반 아이는 총 아홉 명이었는데 숙제를 낸 아이가 네 명밖에 없었다. 숙제를 달라고 목청 터저라 말하고 있는데 어떤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숙제를 못했는데 어떡해요?”라는 것이다. 그 아이는 영어 유치원을 나왔고 어떡하냐는 말을 영어로 물었지만, 개가 영어로 물었다고 해서 내가 말문이 막힐 선생은 아니었다. 문제는 질문이 너무 한심해서 한국말로 답하기 싫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필터링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뱉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야!’로 시작한다. 현실에서 나는 아이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절대 ‘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야! 체벌 없는 대한민국에서 니가 숙제 안 했다고 내가 뭐 어쩌겠어? 널 때리겠니?” 한숨을 팍 쉬고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니가 똥을 싸 놓고(숙제 안 해놓고) 나보고 치우라고? 차라리 똥이라면 벌써 치우고도 남았지. 지나간 숙제는 돌이킬 수 없잖아?”


 하지만 현실에선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거친 말을 표정으로 삼키고, 얼굴과 목소리 톤에 분노가 스미게 했지만, 뱉는 말을 철저히 통제해 이렇게 말했다. “숙제를 안 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야.” 그러자 교실 한 구석에서 장난끼 많은 다른 아이가 말한다. “심각하지 않아요.” 초임 강사라면 이런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강사 경력이 2년에 다다르고 있는 나는 슬슬 지겹기 시작했다.

 “아니, 심각해.”
 “안 심각한데요?”

보아하니 그 아이는 말 꼬투리를 잡고 반복하는 식으로 어른을 이겨본 아이였다.

 나는 “뭐가 안 심각해?”하고 저음으로 고함을 질렀다. 발성 훈련을 한지도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나의 저음은 보통 사람들보다 세 배 더 또렷했고 순식간에 교실 분위기를 눌러버렸다. “선생님만 수업을 하고 너희는 아무 것도 했다는 건데?” 나는 그 아이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이는 긴 잔소리를 예상하는 듯 했지만 난 입을 다물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곧 그 아이의 눈에 두려움이 떠오른다. 그때가 장면을 전환하기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나는 표정에서 독기를 거두고 교실 전체를 향해 영업 사원처럼 미소짓는다. 내가 선생님이라서 수업에 언제든지 긴장감을 끌고 올 수 있었지만, 모든 긴장감은 종이 치기 전에 풀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Open your student book, page 13. (자 스튜던트 북(Student book) 펼쳐요.)”

공기에서 아이들이 안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교실 속 긴장이 절정에 이르렀다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가끔씩 난 ‘~하세요.’, ‘안 돼.’라는 명령어를 쓰면서, 때론 분노를 드러내고 적과 대치하는 선생님이다. 나는 성인을 이기고자 할 때도 똑같은 수법을 썼고 내 이런 모습을 아는 일부 성인들은 나를 ‘권위적이다.’라고 평가했다. 성인과 싸울 때는 말 이외의 다른 요소, 예를 들면 돈과 같은 것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질 때가 훨씬 많지만, 어린이를 상대로는 져 본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20년을 싸워 어머니 아버지 다 이기고 서울로 상경한 사람이었다. 사춘기도 안 겪은 애기들이 어떻게 날 이기겠는가.


이 상황에서 어느 어른이 친절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읽고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교육계에 그런 순진한 사람들이 있었기 떄문에 수업 종이 울려서 교무실로 가는 길, 내게 물어 보았다. 내가 너무 심했던 걸까? 분노를 표출한 것이 잘한 행동이었을까. 아주 잠깐 죄책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교무실로 돌아와 아이들이 40분 동안 공부했던 책을 보는데 정말 가관이었다. 스트레스가 쎄게 몰려와 명치가 저릴 정도였다. 난 이미 그 반이 내가 담당한 다른 네 반 중 태도가 최악인 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악은 태도만이 아니었다. 물에 젖은 교과서와 알아볼 수 없는 글씨와 불러준 답을 하나도 적지 않은 빈 칸들이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어떤 아이들은 나이도 어리면서 오스카급으로 연기를 잘한다. 어려서 오히려 더 잘하는 것 같다. 언젠가 피카소가 말했듯이 연기와 같은 예술은 애초에 어린이들의 것이니까. “선생님 숙제를 못했는데 어떡해요?”라며 그 걱정된다는 조로 말했을 때 그 아이는 대부분 선생님들이 “그래? 못한 건 어쩔 수 없지.”라고 반응할 걸 알고 있어 보였다. 못한 건 어쩔 수 없다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유약한 선생님을 가지고 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애가 악마라는 증거물을 본 나는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아 차렸다. 필터링을 빼고 아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듣는다면 이렇다는 것을.


 “나 오늘 숙제 안 했는데 어쩌실래요? 하기 싫어서 안 했는데 어쩔 거예요?”


나는 다음 주 화요일부터 4월 내내 이 반 개구쟁이들에게 지옥을 맛보게 해주리라고 다짐했다. 이제 겨우 초등 2학년인 아이들에게 조용히 공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반 분위기를 톡톡히 맛보게 해줄 것이다.


얘네가 왜 날 좋아하지?

 이 글을 쓰기 하루 전 있었던 일이다. 퇴근 후 피곤해서 누워 있는데 행정을 담당해주는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짓궂은 남자 아이들을 쥐락펴락했던 토마토 반(가명) 교실 마들렌 학생이 다음 달 4월에도 나의 토마토 반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 마들렌은 다른 교실로 갈 수 있는 선택권을 받았다. 마들렌은 교실에 있던 다른 여자 아이가 몸이 아파 학원을 한 달 쉬면서 원치 않게 홍일점이 되었는데, 나는 마들렌이 외로움을 호소하는 걸 몇 주 전부터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다른 여자 아이의 휴원이 확정되자마자 부장 선생님께 알려 반을 옮기는 문제를 의논했다. 그랬던 마들렌이 3월의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오직 내가 좋아서, 남자 애들밖에 없는 교실을 한 달 더 다니기로 결정했단다.

 문자에 감동한 나머지 나는 벅찬 가슴을 부여잡고는 한참동안 침대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왜?라고 질문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마들렌은 왜 나를 좋아하는 걸까. 토마토 교실을 시뮬레이션 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장면이라고는 남자 아이들을 쥐 잡듯 잡았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마들렌이 내가 하는 연극에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히로인이 꼬마 악당들을 벌주는 모습을 보고 쾌락을 느끼기라도 했던 것일까.

 나에게 남자 아이들을 가지고 노는 건 출근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토마토 반 말포이가 말한다. “선생님 저 필통 안 들고 왔어요.” 그러면 나는 “그래? 너 그 말 세 번째 아니니? 엄마한테 전화 해야 겠다.”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이분 뒤, 돼지 우리 같은 가방에서 필통을 직접 꺼낸다. 수업 시간 내내 꼬물꼬물 움직이던 말포이가 책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어려워서 못 풀겠다고 말한다. 나는 핸드폰을 보고 대답한다. “아니 풀어요. 3분 남았어. 가장 먼저 푼 사람 스티커 두 개.”

 말포이가 스티커를 주겠다는 말에도 반응하지 않는 사이 다른 재빠른 아이들에게서 다 풀었다는 외침이 울리기 시작했다. “봐요. 봐요. 꾸물 거리는 사이 벌써 해낸 사람들이 나오고 있어요.” 곧 경쟁하는 분위기가 교실에 흐르면서 조용해진다. 어려워서 못 풀겠다고 말했던 말포이가 3분도 안 되어서 돌연 다 풀었다고 소리지른다. 역시 모든 아이들은 연기 대상 후보다.

 나는 웃었는데 진심으로 기뻤기 때문이었다. “거 봐. 해내잖아.”

 담임인 나만 아는 사실을 덧붙이자면, 분위기를 흐리던 말포이가 토마토 반 에이스였다. 영어 실력을 평가하는 척도인 유창성과 정확성, 모든 면에서 우수한 아이였다. 다시 말해서 말포이는 태도만 불량했을 뿐 학원과 영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쥐 잡듯이 잡으면서도 난 말포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교실을 바꾸는 마법

 그러나 이러한 연극은 어디까지나 방어였다. 내가 교실에 존재하는 이유는 놀고 싶은 아이들을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영어 하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영어 실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는 잘못한 친구들에게 벌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잘한 친구들에게 상을 주는 방식으로만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애들 잡으려고 복식 호흡을 만드는 것보다 더 공들여야 하는 작업은 학원 화폐로 교환할 수 있는 스티커를 주고 칭찬과 인정의 말을 많이 해주는 것이었다.

 어떤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이 학원에서 스티커를 가장 많이 주는 것 같아요.” 학원 규칙에 따르면 한 아이에게 스티커를 다섯 개까지 줄 수 있었다. 웬만하면 나는 수업마다 그 개수를 다 채웠다. 나는 스티커 백 개가 있는 종이를 흔든다.

“그야. 나는 부자니까. 내게 이건 의미가 없지만 너희한테는 다르잖아."

 Flex를 연상시키는 내 몸짓에 아이들이 흥분하며 말했다.

 “와아아. 저희 다 주세요!”

 그때 나는 깨달았다. 교사의 권력은 교실 속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제 겨우 한 달이지만, 공부하는 학생 세 명만 잡으면 교실 전체를 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교실 속 자유였다. 나는 수업 시간의 대부분을 그들이 자기 스타일 대로 공부하게 놔두었다. 대신에 공부 안 하는 아이들에게 가서 공부 안 하고 떠들면 얼마나 부담스러워지는지를 느끼게 만들었다. 가끔씩 영어로 질문을 할 때만 실제 외국인을 대할 때처럼 거칠게 대해줄 뿐. 문법 지식처럼 한국어로 전달해야 되는 내용은 수업이 끝난 후 걷은 책에 편지처럼 적어 돌려 주었다. 칭찬 스티커도 가위로 잘라 내 시그니처 도장을 찍은 페이지에 함께 끼워두었다.

 하지만 교실 모두가 알아야 하는 대박 사건만큼은 큰 소리로 떠벌린다.

 “이 시험 본 14명 중에서 케이티 혼자 100점이야! 케이티 잘 했어!”하고. 그 자랑스런 이름을 모두가 알게 한다. 그러면 십중팔구 케이티들은 칭찬에 굶주린 사람처럼 행복해 했다. 그들은 뒤처지는 다수 위에 귀족처럼 군림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배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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