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된 심리 스릴러
*사이코 : 과거에 만난 남자들 험담을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는 매력적인 여자. 살다가 그녀를 만나면 얼른 차단하길 권한다.
그 다음 날은 일어나는 일조차 버거웠습니다. 머리는 수건으로 대강 말렸고 화장품은 한 방울도 바르지 못하고 가방 안에 밀어 넣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에게 맨 얼굴을 들키는 것보다 지각하는 것이 더 두려웠습니다. 택시를 잡아 탈까 말까 하다가 정류장에서 다리를 동동거렸습니다.
어떤 유튜버가 그랬습니다. 아낄 수 있는 돈을 아끼지 못해 발생하는 비용을 요즘 사람들은 시발 비용이라고 한다고요.
시발.
부랴부랴 달렸는데도 여전히 피로했습니다. 사무실에 있는 믹스 커피를 탔습니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질 수록 심박수가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사무실을 돌아보는데 칸막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프로 게이머처럼 보였습니다.
협력과 경쟁 사이에서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부모에게서 회사를 물려 받은 재벌 3세는 이십대를 골프와 파티를 즐기며 여자들과 화려하게 보냈다는 소문과 달리, 세계를 돌아다니며 대학과 공장에서 사람, 돈, 기술을 끌어 오는데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회사의 모든 프로 게이머들이 젊은 창업자의 행동 패턴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에 어디로 갈까. 베트남일까. 일본일까.
울산 공장으로 연락하려고 전화기를 들고 있는데 누군가가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온몸을 딱딱하게 만드는 싸한 눈빛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를 방어하고자 그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그가 눈을 피했습니다. 안정을 찾았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과학적이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음을 피부로 느끼는 것을 과학이 증명할 수는 없으니까요. 벌써 십 년 동안 사주를 공부하고 있는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사주팔자를 공부하면 한 인간을 둘러싼 주변 에너지를 읽어낼 수 있다고.
아버지는 그 에너지가 인생을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손톱이 손금을 새로 그릴 만큼 세게 쥐었습니다.
‘아니. 아빠. 이건 내가 선택한 인생이야.’
불길한 기운은 그 사람 말고도 더 있었습니다. 주변을 살피자 물고기 떼처럼 모여 있던 사람들이 도망치듯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것이 노력에 대한 대가일까.’
그토록 안정을 기다렸으며 불과 어제 승진과 사랑을 잡았다고 좋아했는데, 어째서 저의 인생은 마가 낀 것처럼 불운한 일이 다가오는 걸까요. 회사에 내 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어린 나이로 승진을 해서? 질투심 때문에?’
옛날에 저를 챙겨주던 팀장님이 떠올랐습니다. 팀장은 저를 다른 직원들 몰래 칭찬하고 싶어했고, 바깥 화장실을 이용하고 식당으로 돌아가려는 저에게 식혜를 건넸습니다. 유리창 뒤로 다른 동료들이 고기를 구울 때 팀장 님은 엄지를 들었습니다.
“역시 홍나무. 언제나 일 등!”
상사의 얼굴은 맥주 몇 잔으로 불거져 있었습니다. 짠. 상사가 턱을 들고 식혜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걸 보았습니다. 그는 캔을 밟아 구겼습니다.
“내가 나무 씨 면접 볼 때, 주변에서 말이 많았거든.”
“주변에서요?”
“그래. 뽑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그런데 내가 나무 씨를 뽑았잖아.”
저는 ‘삼겹살, 목살, 갈비’ 등이 적힌 스티커 위로 동료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건너다 보았습니다. 앞에서는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이 저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상사가 남기고 간 찌그러진 식혜 캔을 바닥에서 떼어 냈습니다.
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때 웃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입사하도록도왔던 상사는 쫓겨났 다고 합니다. 도대체 누가. 그가 떠난 후 회사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습니다. 회식에 열기가 더 붙었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사생활을 공유하는 문화가 퍼졌습니다.
저는 팀장과 소통하지 않는 별그램 팔로워로 남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팀장의 성품을 좋아합니다. 그와는 ‘일은 일이고 친목은 친목이니, 할 일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단 점에서 가치관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가치관을 지켜낼 거라 확신하기엔 저는 너무 어렸습니다.
“팀장 님.”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일 년차 계약직 사원이었습니다.
[워크넷 한 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포스트 잍을 받자 마자, 워크넷에 로그인 해 자유 게시판을 클릭했습니다. 어떤 게시글이 문제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자 신문에 우리 회사 MRO 부서 구매 팀장 나옴.’
제목을 읽자 마자 공감 능력이 환하게 켜졌습니다. 글을 클릭하니 글쓴이의 마음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내 브레지어마저 벗기려는 악의는 어떻게 생긴 걸까.
스크롤을 내리니 온몸이 모자이크 처리 된 여자가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손가락에 걸린 빨간 브레지어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다리 하나에 무게 중심을 두며 골반을 강조한 포즈가 마네킹 같았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겨우 몇 초 만에 그런 분석을 했습니다. 변태처럼 영상을 뜯어보면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영상이었고 시민이 촬영한 영상을 언론이 편집했으며, 종편 채널 앵커가 조현병 환자가 나체로 밤 거리를 누볐다는 자극적인 문구를 서슴없이 발화하고 있었습니다.
[님. 저게 구매 팀장인 걸 어케 암?]
작성자는 댓글에 하나씩 응답하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제 저기 있었음. 내가 @대학 출신이라 동창들 만나러 어제 저기 갔거든. 구매 팀장 얼굴인 거 현장에서 확인함.]
[와 그런데 피지컬 대박이다. 여자가 저래서 이 정도지. 남자가 저러면 개 욕 먹었을 듯.]
[아니. 님 옛날 사람임? 요즘은 피지컬 가꾸는데 여자 남자 없음.]
[구매 팀장 오늘 출근 함? 조현병 증상이 저 정도면 입원해야 하는 거 아님?]
여기까지 읽고 워크넷을 꺼버렸습니다. 초반 댓글이 이런 분위기라면 나머지 댓글이 악플로 흘렀을 가능성이 뻔했습니다. 굳이 댓글 서른 개를 읽을 필요가 없어 보였습니다.
눈을 감고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워크넷 관리자가 게시글을 삭제해주면 좋을 텐데,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정체 모를 워크넷 관리자를 이 큰 회사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눈을 뜨자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실시간으로 평판이 깎이는 중인데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