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연에게 임무를 맡긴 후, 비수는 몸을 일으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이틀 전, 그는 건이라는 사내와의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그 경험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건과의 싸움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해준 계기였다. 건은 그를 쓰러뜨린 후 사라지기 전에, 비수가 지닌 황금빛 기운에 대해 언급하며 그 출처를 의문시했다. 그 말은 비수의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며, 더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을 불태웠다.
그 황금빛 기운은 비수가 은명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진정한 본질과 잠재력을 그는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수는 그것이 단순한 힘 이상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은명이라는 소년을 통해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로 인해 비연에게 은명의 위치를 확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비수는 그녀에게 당부했다. “이 일은 최대한 깊이 관여하지 말고 상황을 지켜본 후 돌아와.” 하지만 비연의 성격을 잘 아는 그는,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을 가능성 또한 예상하고 있었다.
전서구가 예정대로 다음 날 아침에 돌아올 것이라 했지만,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그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히며 흩날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빗물은 안개와 섞이며 세상을 흐릿하게 감쌌고, 그의 마음처럼 답답하고 무거웠다. 결국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새벽빛이 하늘을 어슴푸레 밝히자, 그는 깊은 호흡을 내쉬며 길을 떠났다.
산길은 비로 인해 진흙탕이 되어 있었고, 무거운 구름은 하늘을 짓눌렀다. 나무들 사이로 흐르는 안개는 길의 끝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나 강화된 내공과 전투에서 얻은 경험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비수의 발걸음은 흔들림 없었고, 그 눈빛은 강렬했다. 그는 패배 후 얻은 교훈을 되새기며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다. 곳곳에 남겨진 발자국은 병사들이 추적을 시작했음을 암시했다. 그는 흔적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비연이 단순히 소년을 돕는 데 그치지 않았을 거야. 그녀라면 분명히 위험을 감수하고도 자신의 신념을 따랐겠지.’
길을 따라 걷던 그는 불규칙하게 얽힌 풀숲 속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칼날의 자취였다. 비수는 가까이 다가가 검술의 흔적을 세심히 살폈다. 풀과 나뭇가지가 베어진 각도와 깊이는 단순한 추격전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에서 비연의 검술 방식이 느껴졌다.
‘비연이 여기서 싸웠어... 누굴 상대한 거지?’
비수는 살짝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자국을 따라가며 더 깊은 흔적을 찾아냈다. 땅에 눌린 흔적과 파편들은 누군가가 쓰러졌음을 암시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검술 흔적은 아래쪽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점차 성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강화된 내공 덕분에 비수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육왕성에 다다랐을 때, 성 주변은 마치 폭풍 전야처럼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장사꾼들은 성문 근처에 모여 있었지만, 평소의 활발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병사들의 수가 평소보다 훨씬 많아졌고, 사방에서 순찰을 도는 모습은 어수선한 기운을 더했다. 성문 근처에서 장사꾼 몇 명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병사들이 평소보다 많아 보이는군요.” 장사꾼 중 한 명이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성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평소와 다르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요.”
다른 장사꾼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자가 붙잡혔다는 소문이 있어요. 성주님이 직접 지휘관에게 심문을 맡겼다더군요.”
그 말을 들은 비수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그는 성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하며 내부를 살폈다. 좁은 골목과 이어진 복잡한 구조는 탈출이 쉽지 않음을 암시했다. 병사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순찰을 돌며 주위를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그는 문틈으로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소년을 구하려 했지? 너처럼 뛰어난 실력자라면 훨씬 유리한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휘관의 목소리는 비아냥과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겹지만 단호했다. “구하고 싶어서 그랬어. 그게 이유야.”
지휘관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 아이가 단순한 소년이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무모하게 목숨을 거는 이유가 뭐야?”
비수는 문틈으로 비연을 엿보았다. 그녀의 손목은 결박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어깨는 처져 있었다. 고문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굳건했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필요 없어. 네 협박으론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비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내공을 끌어모으며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한층 날카롭게 빛났다. “용천폭격(龍天爆擊).”
그의 검 끝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 기운은 문을 폭발하듯 부수며 방 안으로 퍼졌다. 방 안의 모든 것이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병사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벽은 금이 가고, 창문은 산산조각났다. 방 안의 공기는 검기로 가득 찼고, 비수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비연!” 그의 외침은 방 안을 울렸다.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았지만, 비수의 움직임은 이미 그들을 앞질렀다.
첫 번째 병사가 검을 휘두르자 비수는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용선검(龍旋劍)!”을 외쳤다. 그의 검은 물결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며 병사의 검을 튕겨내고, 이어 황금빛 섬광으로 그를 제압했다. 두 번째 병사가 비수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는 가볍게 발을 굴리며 “용소속검(龍嘯速劍)!”을 펼쳤다. 날카로운 검기가 병사를 둘러싼 공기를 가르며 방어를 꿰뚫었다.
병사들은 점점 혼란에 빠졌다. 지휘관이 외쳤다. “모두 공격하라! 절대 놓치지 마라!”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비수는 검을 하늘로 치켜들며 “용환난무(龍環亂舞)!”를 외쳤다. 검 끝에서 펼쳐진 황금빛 궤적은 방 안을 휘감으며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검기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방을 흔들었고, 벽이 무너질 듯 금이 갔다. 마지막 병사가 쓰러지자, 비수는 지휘관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네가 그녀에게 한 짓을 후회하게 될 거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지휘관은 검을 들고 방어하려 했지만, 비수의 검격은 그를 압도했다. 마지막 일격이 지휘관의 방어를 무너뜨리며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비수는 비연에게 다가가 결박을 풀었다. 쇠사슬은 그의 검 끝에 닿는 순간 산산조각났고, 방 안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괜찮아, 비연.” 그는 품에서 포션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걸 마셔. 곧 나아질 거야.”
비연은 포션을 받아들고 천천히 마셨다. 그녀의 얼굴에 미약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말 와줄 줄 알았어, 오빠.” 그녀가 힘겹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비수는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이제 내가 해결할 차례야. 나가자.”
그들은 복도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비연은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앞장서며 외쳤다. “오빠, 이쪽이야!”
비수는 병사들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방 안을 뒤돌아보았다. 그의 검 끝이 빛나며 주변의 잔해가 일순간 공중으로 흩어졌다. “지금 당장 쫓아오지 못하게 해주지.” 그는 단전에서 기운을 끌어올리며 마지막 검격으로 복도를 완전히 파괴했다. 건물의 구조가 흔들렸고, 병사들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성을 빠져나와 밤하늘 아래로 나왔다. 비연은 비수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미안해 오빠 내 마음대로 행동해서.”
비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니가 그렇게 할지 알고 있었어. 아무튼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