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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건의검 07화

7화 은명의 정체

은명 vs 건

by 대건

은명은 비연과 헤어진 뒤, 강기슭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쫓아오는 자는 없었다. 비연이 모든 것을 깔끔하게 처리해 준 덕분이었다. 그는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마치 방금 전의 긴박한 상황마저 재미있는 놀이에 불과했다는 듯.


"인간들은 참 단순해." 은명은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손끝으로 강가의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고, 툭 던져 강물 위에 튕겨 나가게 했다. 물결은 은명이 던진 돌을 따라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어린 소년의 앳된 외모는 여전히 무해해 보였지만, 그의 태도와 동작에는 어딘지 모를 이질적인 기운이 묻어 있었다.


그는 한참을 걸은 뒤, 강가의 바위에 털썩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으로 흙을 툭툭 털어내며 낮게 웃었다. "이 정도면 꽤 흥미로운 하루였네. 인간들 속에서 이렇게 놀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년다운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연륜과 장난기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다들 나를 어리고 무력한 소년이라고 생각하겠지. 덕분에 속아 넘어가기 딱 좋다니까." 그의 눈동자가 잠깐 금빛으로 번뜩였다가 이내 다시 평범한 갈색으로 돌아왔다.


은명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강물을 바라보았다. "비연은 날 걱정했을까? 아니면 단순히 의무감이었을까?"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 둘 다 상관없지. 인간은 항상 그렇게 복잡하면서도 단순하니까."


그의 말을 끝으로 주위는 고요해졌다. 그러나 곧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은명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순수한 소년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거기 누구세요?" 은명이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검은색 도복을 입은 건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느리지만 매 순간이 날카로웠다. 건은 은명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서 있었다.


"골드드래곤의 흔적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네놈이었군." 건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은명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골드드래곤이라뇨?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다." 건은 단호했다. "네가 강가에 남긴 흔적, 네 손짓에 반응한 강물, 모두 너의 정체를 숨길 수 없게 만들었다."


은명은 짧은 침묵 끝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미소는 순수함에서 비꼬는 듯한 태도로 변했다. "정말 귀찮게 하네. 들켰다면 어쩔 수 없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단순히 음성의 변화가 아니라, 그 속에서 울리는 무언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소년의 모습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날 찾아낸 게 무슨 대단한 일 이기라도 해?"


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협약을 어겼다. 너희 드래곤은 인간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네 존재 자체가 인간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힌다."


은명은 몸을 일으키며 길게 하품을 했다. "협약? 아, 그거." 그는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딴 건 신경도 안 써. 내가 뭘 했는데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건데?"


건은 냉정히 응수했다. "네가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 존재 자체가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드래곤은 인간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은명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인간다운 사고방식이네. 규칙, 질서, 협약. 그런 게 너희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건가?"


그는 건을 향해 한 발 다가서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해. 협약 같은 건 누가 만들었든, 결국 지킬 사람만 지키는 거 아냐?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뿐이야. 그게 뭐가 나빠?"


건은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의 눈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너희 드래곤이 협약을 어기면,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다."


은명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거두었다. 그의 주위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금빛 아우라가 몸을 휘감으며 점점 짙어졌다. "결과라... 재미있네. 네가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 보여줘 봐."


은명은 건의 차분한 말을 듣고 한참을 침묵했다. 이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그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떨렸다. "참 이상하네. 인간들이 언제부터 드래곤과 대등하게 논할 수 있는 존재가 됐지?" 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낮았지만, 그 안에는 억제되지 않은 분노가 스며 있었다.


건은 그의 말을 차분히 받아쳤다. "나는 네가 협약을 어겼음을 말하러 온 것이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며, 내 존재 이유다. 네가 어겼다는 그 협약은 오래전 우리 선조들이 너희와 맺은 약속이다."


은명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선조들? 그러니까, 네가 그 협약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네 조상들이나 들려준 이야기에 불과하단 거네. 그런데 그런 낡은 전설을 들고 와서 나를 비난해?"


건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협약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약속이었다. 네놈들이 인간 세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그 약속 덕분에, 인간들은 스스로의 질서를 세울 수 있었다."


은명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건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묻고 싶군. 네놈들이 그 질서를 제대로 지키고 있긴 한 거냐? 인간들은 여전히 서로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고, 탐욕에 눈이 멀어 자기들끼리도 잡아먹고 있잖아. 그런 인간들이 질서를 운운한다는 게 얼마나 웃긴지 생각해봤나?"


건은 은명의 도발에도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인간의 싸움과 혼란은 그들 스스로의 문제다. 그것은 인간 세계의 균형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드래곤의 존재는 그 균형을 파괴한다. 너희는 단순히 이 세상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그 흐름을 왜곡한다."


은명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거두었다. "그럼 네 말은,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인간 세계에 위협이 된다는 거지?"


건은 단호히 대답했다. "그렇다. 네 존재는 인간 세계의 균형을 어지럽힌다. 협약은 단지 드래곤의 행동을 규제하려는 게 아니라, 네 존재 자체가 인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억제하기 위해 맺어진 것이다."


은명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지. 네놈들이 만든 그 하찮은 규율이, 정말로 드래곤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거냐? 오래전에 맺은 약속이라지만, 나는 그 협약을 지킬 이유를 모르겠군."


건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응수했다. "협약은 너희 드래곤들에게도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네놈이 그 약속을 어겼으니,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은명은 그의 말을 듣고 천천히 웃음을 터뜨렸다. "평화? 너희 인간이 만들어내는 건 늘 전쟁과 혼란뿐인데, 드래곤이 인간을 억제하기 위해 협약을 지켰다는 거지. 얼마나 위선적인 생각이야."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며, 주위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좋아. 너희가 원하는 대가가 뭔지 확인해보자."


말이 끝나자 은명의 손짓에 따라 강가의 물결이 거대한 장벽처럼 치솟았다. "내 존재가 인간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했지? 그럼, 그 질서라는 게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보여줘 봐!"


건은 미동도 없이 검을 단단히 쥐었다. "너는 그 질서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오늘 그 대가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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