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평 01 <글래디에이터>(2000) : 자신만이 아는 승리의 루틴
이 영화를 올해 첫 작품으로 삼은 까닭은 내가 오랜만에 담임으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고3을 맡으며 어떤 선생이 되어야 할까 고민하다 떠오른 인물이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막시무스’였다. 이름도 얼마나 멋있는가, Maximus, 라틴어로 ‘가장 위대한 남자’라는 뜻이다. 러셀 크로우가 씩 웃으며 등장하여 투구도 없이 부하들과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하다가, 결국 야만인들과의 일전을 앞두고 투구를 쓰기 전, 무릎을 꿇은 채로 그 축축한 게르마니아의 검은흙을 한번 스악 쓸어 담더니, 코로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는 툭툭 털어내며 일어난다. 캬아, 명장면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이게 왜 명장면이냐면, 막시무스는 그 후로 줄곧 중요한 전투 앞에서는 이 루틴대로 간다. 총사령관 막시무스일 때도, 검투사 스패냐드일 때도 마찬가지다.
검으로 적을 찔러야만 하는, 그래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때로는 자신이 적에게 죽임 당할 수도 있는 결투 앞에서, 뭔가 승리를 향한 자신만의 루틴을 만든 것이다. 이 루틴이 어떤 면에서는 징크스일 수도 있는 까닭은, 영화의 시작부터 카메라의 초점은 막시무스의 투박한 그 손을 향하고 있다. 검을 들고 적을 찌르고 피를 묻혀야만 하는 장군의 손이, 사실 고향 땅의 밀밭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낸 장면이다. 지금은 북유럽의 춥고 눈 날리고 습습한 땅에 머물러 있지만, 남유럽의 그 따사한 햇살을 받고 여러 풀과 나무의 향을 맡으며 밀 이삭을 손으로 스윽 쓸고 가는 장면에는, 결국 죽음의 문을 두드린다는 설정도 겹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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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는 정말 멋진 남자 리더이다. 25년이 지난 지금 영화를 다시 봐도, 이 정도로 멋진 남성이 있을까, 이건 여자나 남자나 모두 공감할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군 북부 총사령관으로 돌변하기 전까지는, 이방 땅에서도 작은 종달새를 쳐다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소년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고향 땅에서도 보아왔던 새일 것이고, 그 순간 7세 된 아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밤마다 그는 깨끗하게 씻고 난 후, 램프를 켜고는 자기 아내와 아들을 닮은 나무 인형을 손에 꼭 쥔 채 입맞춤을 하며, 조상님들께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마치 어린아이가 잠들기 전, 올리는 기도와 닮았다. 그만큼 그는 소년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감성 그대로 병사들과 스스럼없이 인사 나누고 격 없이 대화한다. 그렇다고 그가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부관이 병사에게 투석기 위치를 놓고 조정하라며 야단치자, 그 정도 위치면 괜찮다고 어우르며 달랜다. 적을 공격하면서도 아군 보병은 보호한다는 취지의 말인데, 부관을 무안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병사를 존중하는 장군의 위엄이 돋보인 장면이다. 공교롭게도 이 부관은 조금 후 자신을 배신하고 코모두스의 편에 서서 훗날 근위대장이 되는 퀀투스이다. 배신자가 될 사람도 자기 부하로 품을 수 있는 막시무스의 아량 덕분인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막시무스와 코모두스의 혈전 가운데 퀀투스는 다시금 배신을 하며 막시무스를 돕는다.
다시 첫 전투 장면으로 돌아와, 막시무스는 부하들과 일일이 마주치며 인사하는, 보통 군에서 사열이라고 하는데, ‘Strength and Honor’를 외치고 건투를 빈다. 영화의 공식 번역은 ‘끝까지 명예롭게!’로 되어 있다. 직역하면 ‘힘과 명예!’겠지만, 그 힘이라는 것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즉 끝장내기 위한 ‘지구력’을 의미한다는 차원에서 ‘끝까지’로 의역한 듯싶다. 나는 이 대사에 꽂혔다. 그래서 글의 제목으로 삼았고, 올 한 해 나의 급훈으로 삼으려 한다.
이렇게만 글을 써놓고 보니, 나 스스로가 마초이즘에 푹 빠진 아재가 된 기분이다. 그러나 막시무스는 거칠기만 한 상남자가 아니다. 그는 남성들의 그룹에서 아래로부터 충성심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부드러운 리더십을 지녔다. 자신만을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아집으로 똘똘 뭉친 관종이 아니라, 권력욕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할 줄 아는 촌부로 그려진다. 부하들에게 ‘사령관님이 농부라니요’라는 피드백을 받을 정도면, 평소 그가 어떠한 동료이자 상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던 남편이자 아빠였던 농부 막시무스가 잠시 자기 소망을 내려놓고 지키고자 했던 것이, 또 한편으로는 주군이자 마지막 성현 아우렐리우스가 일구어 놓은 ‘로마의 영광’이었다. 물론,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비다가 회의론에 빠져서, 도대체 내가 지키려고 했던 로마의 영광이 무엇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이것은 정치 혹은 전쟁을 너무 오래 겪다 보면, 즉 노장 혹은 베테랑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회의론이다. 물론, 정치와 전쟁은 그 성격이 다르다. 아우렐리우스가 그렇게도 막시무스를 아끼고 사랑한 까닭도, 그가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킬 줄 아는, 깨끗한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코모두스가 아직 반역을 꾀하기 전, 원로원들이 차기 황제를 놓고 막시무스를 떠 보는 말을 한다. 막시무스 장군은 황제와 원로원 중 어느 제도를 선호하는가를 묻는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에서는 아우렐리우스도 이 통치제도를 놓고 고민한 현자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는 오현제의 시대를 마감하고 로마 암흑기의 시작인 코모두스에게 ‘세습’을 한 아우렐리우스의 패착을 비판하기 마련이다. 그때 막시무스는 ‘저는 피아식별이 가능한 일이 좋다’는 지혜로운 답변을 한다. 누가 적인지 동지인지도 구별하기 힘든 아사리판 같은 정치는 싫다는 의미이다.
이 막시무스의 깨끗함 혹은 명예로움은 그의 ‘복수’ 서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부정하며 극복하는 노력을 할 뿐, 복수를 권력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복수도 ‘깨끗하고 순수한 복수’와 ‘더럽고 지저분한 복수’로 만약 양분할 수 있다면, 막시무스는 확실히 전자다. 그가 코모두스를 죽일 수 있다고 처음부터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저 아내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도망칠 뿐이고, 결국 자신 탓에 먼저 저승에 간 가족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살아나 보니 노예가 되었고 그것도 ‘죽기 딱 좋은’ 검투사가 되었다. 하루하루 죽음을 맞닥뜨리는 검투사는 죽더라도 명예롭게 죽어야만 한다는 신념 가운데 결국 로마로 입성한다. 아마 프록시모가 자기 신분이 바뀐 과거를 이야기할 때, 나도 혹 황제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스패냐드에게 먼저 다가온 사람들은 황녀 루실라와 원로원 그라쿠스 같은 정치인들이다. 권력을 위해 접근한 그들에게 막시무스 아니 스패냐드는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검투사 노예라고 고백한다. 이미 그는 검투사를 시작하던 날부터 자기 팔뚝에 있는 문신을 돌조각으로 벗겨내던, 자기부정의 분투를 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무 주인공이라서 미화하는 감도 없지 않지만, 오랜만에 참으로 완벽한 남자 사람을 마주하니 놀랍다. 그를 위해 검투사 동료들과 심지어 그의 주인 프록시모도 목숨을 바친다. 그의 오래된 하인 시세로는 노예가 된 주인님을 만나자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고, 막시무스의 옛 부하들을 규합하다가 죽음에 이른다. 그럼에도 막시무스 주변의 사람들은 막시무스를 위해서 후회 없이 죽는다. 그 까닭은 막시무스가 평소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살았기 때문이다. ‘중세 전투’에 대한 로망이 한껏 뿜어 나오는 첫 장면에서, 야만족들의 후미를 기습하려 높은 계곡에서부터 내려오는 기병 작전이 펼쳐진다. 그때 외치던 ‘Hold the Line! Stay with Me!’가 그의 리더십의 전부다. 장군의 이 리더십은 훗날 검투사들의 포에니전쟁 재현 단체전, 즉 전차군단 격퇴 장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뭉치면 살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검투사 동료들에게 자신감 있게 외치고 실천해 내는 그의 모습이란, 뭐랄까 황홀하기까지 하다.
거기다가 그는 로맨스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불륜이 아니다. 이 부분이 같은 남자로서 참 멋있다. 서사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짜여있는 셈이다. 막시무스와 루실라는 각자의 결혼 전 사랑하던 연인이었을 것이다. 공주와 장군 사이의 로맨스, 이 장군은 황제의 사위가 되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권력욕이 강한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시절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 현재 루실라의 아들이리라. 이 아들과 막시무스 자신의 아들이 7세로 같은 나이라는 설정은, 25년 전부터 리들리 스콧 감독이 후속 작품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글래디에이터> 2편은 비주얼적으로는 훨씬 뛰어난 작품일지는 모르겠으나, 서사의 위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대부분 그러하듯, 위대한 작품 이후 속편이 원작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이 영화의 2편을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볼 마음이 없다. 주인공이 심지어 내가 애정하는 청춘 드라마 <노멀 피플>의 ‘코넬’ 폴 매스칼이지만 말이다.
풍문을 들어보니, 2편에서는 주인공이 왜 복수를 하려는지에 대해서 막시무스만큼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이 두 작품은 쉽게 비교가 된다. 복수의 서사가 완벽하게 구성된 다음에야 나머지 서사, 예를 들어 로맨스도 들어맞을 수 있는 셈이다. 윤리적으로 복수를 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로맨스는 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막시무스와 루실라는 어떤 이유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 짐작으로는, 권력 문제에 대한 이견 때문에 둘은 사랑했지만 혼인은 하지 않는 사이로 남았고, 이 까닭으로 황제 때문에야 어쩔 수 없이 마주칠 뿐, 서로 피하며 산다. 그래서 안 보고 지냈던 7여 년의 시간이 흘러, 루실라는 사별하고 과부가 되고, 막시무스는 아내와 아들을 잃게 된다. 그리고 다시 구 황제 시해 사건에 대해 둘 다 증인 비슷한 처지가 되고, 현 황제 제거에 대해 입장을 같이 하는 동료가 되어 만난다. 물론, 신분은 한쪽은 황녀이고 다른 쪽은 검투사 노예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래서 이 ‘면회’ 장면에서 짧은 키스가 로맨스라면 유일한 로맨스인데, 이것마저 윤리적으로 처리된 게 이 영화의 미덕이다.
결국 이 영화가 나에게 남긴 것은 막시무스가 승리를 위해 보여준 자신만의 루틴이다. 막시무스의 아들 ‘루시우스’도 이 루틴을 따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나는 권력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로마를 위해 싸울 뿐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단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다. 그것도 정말 멋진 남자였으니,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얼마나 명예롭게 기억하고 따르려고 했을까. 그러나 아버지가 지키려고 했던 ‘로마의 명예’가 도대체 무엇인지가 스스로에게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다면, 서사도 영화도 인생도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막시무스나 루시우스 못지않게 내 인생도 전쟁터 혹은 검투장과 같다고 비유해 본다. 콜로세움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교실이든 강의실이든, 학생들을 만나러, 그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 배후에 있는 부모와 가정이 관중이 되어서, 응원 혹은 비난하고 있는, 교육의 전장으로 간다. 교육의 현장을 전장(戰場)이라고 생각해 본 것은 사실 처음이다. 그런데 교육의 현장을 경험하면 할수록, 그곳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곳임을 깨닫는다. 학교란 모든 사람이 거쳐 가고, 사람의 마음이 살기도 죽기도 하는 곳 아닌가. 그 교육의 현장이 가정이든 유치원이든 학교든 대학이든 말이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곳이면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전장에서 나는 여태껏 죽지 않고 다행히도 살아 있다. 지금 살아 있어도 언젠가는 나도 죽을 것이다. 그래서 늘 죽으러 가는 게 살아남는 방편이 된다. 그래서 나는 막시무스 같은,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 좋은 선생은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빠이며 좋은 남자일 수밖에 없다. 나는 다시 이 교육의 현장감 넘쳐나는 교실로 들어가, 교실의 공기를 마시고 교실의 흙을 주워 담아, 냄새도 한번 킁킁 맡고 손바닥을 툭툭 털어낼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과 주먹이든 어깨든 마주치며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를 나눌 것이다. 막시무스! 끝까지 명예롭게!
* 참고자료 : 글래디에이터 OST <Strength and Honor> (한스 짐머)- https://youtu.be/LBzA3RSdy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