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의 유구한 시절을 담아
그게 니 명줄이여. 할아버지가 너 오래 살으라고 준.
한 달에 한 번, 어김없이 찾았던 종숙과 진호의 묘를 석 달이 지나도 다녀오지 못했다. 삼동에는 꼭 찾아야지 찾아야지 하다가 끝자락이 돼서야 그들을 만났다. 어느 계절이든 포근했던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 한적하고 청량한 그 길들이 좋아서 그들의 묘를 다시 찾는 일이 많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피할 새도 없이 가을을 덮친 겨울을 다시 봄이 덮치려는 듯 따뜻했던 묘길 따라 내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묘비 뒤로는 꽃봉오리를 터뜨린 진달래가 보였는데 이 작은 아이는 지금이 봄인 줄 착각한 모양이다.
“다른 꽃보다 일찍 질 텐데.”
조금 일찍 핀 꽃이 일찍 지듯 내겐 진호가 그랬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종숙과 함께 볼 수 있는 날들이 펼쳐지는 지금 그와의 시간도 같이 쌓을 수 있었고 진호의 목소리를 영영 떠올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도 여전히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모진 마음을 얻고 변덕을 실컷 늘어놓는 내게 건네는, 사랑과 핀잔이 섞인 깊고 짙은 진호의 목소리가. 그 목소리는 나의 엄마가 나를 가졌을 무렵 종숙이 꿨던 꿈과 많이 닮아있다.
저어기 높은 산골 꼭대기에서 진호가 아래편 골짜기에 있는 종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받아.”
“그게 뭔데.”
“기남이 애 가졌는데 기저귀 하라고.”
진호는 새하얀 소창을 종숙에게 던져준다. 감아도 감아도 끝이 없는 소창을 계속 감아데던 종숙이 어렸던 내게 곧잘 하던 말이다.
“그게 니 명줄이여. 할아버지가 너 오래 살으라고 준.”
나의 탄생에 가담한 이들과 출생의 사랑스러운 대목으로 기억된 이 장면이 내겐 진호의 목소리다. 아마 내가 피어나면서 진호가 더욱 활짝 피도록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