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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기 Aug 16. 2024

내 마음속에 심리상담소 만들기

콩순이 마음상담소를 개소하기에 앞서

대학 시절, 오랫동안 지속되던 상담을 받던 어느 날, 상담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기억에 의존한 거라 정확히 이 말은 아니었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보자면,)


"선생님. 처음엔 선생님 없이 일주일을 버티기가 힘들었거든요. 근데 일주일에 한 번씩 계속 상담받고, 상담받고, 또 상담받다 보니까 신기한 게요. 상담 없이 일주일 보내면서, 제 마음속에서 자꾸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힘들 때 마다요.


이 얘기는 상담실 가서 해야지. 아, 이것도 힘드네. 이 얘기도 상담실 가서 해야지. 이렇게요.


어느 날 힘들 때는 아예 본격적으로 마음속에서 얘기를 시작한 적도 있어요. 그럴 때면 어떤 게 떠오르냐면요. 지금 제가 상담받는 이 상담실 장면이 떠올라요. 영화처럼요. 맞은편에 상담선생님도 앉아계시고. 근데 딱 선생님 모습은 아니에요. 그냥 사람 느낌?


그리고 제가 맨날 책상만 쳐다보고 얘기하니까. 여기 이 책상하고요. 선생님 손하고요. 상체 일부랑. 목 언저리까지만 보이고. 그리고 백그라운드에는 상담실 풍경이 있더라고요. 여기 있는 식물들이랑. 이끼랑. 저 뒤에 있는 가습기랑. 이곳 상담실 분위기랑. 제가 앉은자리도 느껴지고.


이렇게 해서 상담실 분위기가 제 마음속에 떠오르더라고요. 그럼 마음이 저절로 편안하고 안락해지면서. 할 얘기가 막 떠오르는 거예요. 진짜 선생님한테 얘기하는 것처럼요. 말하고 나면 속도 시원해지고. 그래서 막상 상담실에 오면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진짜 신기한데. 아무튼 그랬어요..."


'상담실 와도 할 얘기가 없다'라는 말을 해도 되나 싶어서, 선생님 눈치를 보며 말을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그러나 상담선생님은 뜻밖에 웃으며 대답해 주셨다.


"잘하셨어요. 00씨 마음속에 상담실이 만들어졌군요. 그건 사실 모든 상담의 목표라고 할 수 있어요. 내담자가 상담에 오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거요. 00씨는 이미 그걸 하고 있네요.

(*내담자: 올 래, 이야기할 담 자를 쓴다. 상담에 와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뜻한다.)


00씨, 그 상담실 이미지를 잘 기억해 두세요. 아마 00씨가 상담을 종결하고 나서도 00씨에게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00씨가 힘들 때마다 마음속에 상담실 풍경을 떠올리면서 얘기를 할 수 있겠지요. 그럼 힘든 일이 있어도 잘 버텨갈 수 있게 돼요. 그 풍경을 잊지 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써 보세요."


그 후로 몇 회기를 더 지속하고 상담은 종결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마음속의 상담실 풍경을 잘 기억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그 풍경과 함께 기억에 선명히 남았다.


선생님의 말씀대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이 될 때까지 나는 종종 마음속 상담실에 방문했다. 물론 늘 그 이미지가 생생하게 떠올랐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렴풋한 느낌을 더듬어가며 나는 마음속에서 내 마음을 털어놓고, 털어놓고, 털어놨다. 그리고 많은 경우 개운해졌다. 분명 혼자서 속앓이 하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 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마음상담소라는 곳은 평소에는 까맣게 기억 저편에 잊혀 가다가, 힘든 상황이 닥칠 때 그제야 허둥지둥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곳이라, 사실 언제나 수월하게 작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먼지 쌓인 문을 열고 들어가 삐그덕 대며 두서없이 말을 내뱉다 보면, 어떨 땐 별다른 해소감 없이 뒤돌아 나와야 했던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땐 또 해소되지 않는 우울과 불안과 절망에 허우적대며... 또 다른 의지처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다.


이 마음상담소라는 오래되고 먼지 쌓인 현판을 다시 꺼낸 건 그 이유 때문이다. 기계도 기름칠을 해줘야 잘 달리듯 마음상담소도 때 빼고 광내고, 평소에 잘 정리하고 있어야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원활히 작동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마음상담소를 잘 운영하는 방법을 하나 고안해 보았는데, 몇 가지 규칙을 만들어 붙이고 이 상담소에 등장할 인물들도 만들어 보는 거였다. 또 '마음상담소'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있을 수 있는 공간처럼 보이니, 나만의 특별한 이름도 한 번 붙여보기로 했다.



[ 마음상담소 규칙 ]

1. 힘들 때만 오지 말고 즐거울 때도 오자.

    (너무 힘들 때만 찾아오면 상담소 내부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2. 정기적으로 오자.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3. 자유롭고 솔직하게 털어놓자.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규칙은 우선 이렇게만 하려고 한다. 앞으로 더 만들어질 수도 있고, 수정되거나 삭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정, 삭제할 시 반드시 마음상담소 회원 2인 이상의 동의를 받을 것.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심사숙고하라는 뜻이다.)



[ 마음상담소 회원 명단 ]

1. 상담자: 익명의 상담선생님.

상담선생님에게 이름을 붙일까 고민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상담선생님은 내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주어야 할 존재이므로 모습을 너무 고정해 버리면 자유로운 털어놓음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상담선생님의 역할은 들어주기이다. 상담선생님의 들어줌 덕분에 내담자는 마음상담소에서 편하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


상담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상담선생님이 말하면 상담의 몰입이 깨지기 때문에) 상담선생님은 늘 거기 그 자리에 있으며 경청할 뿐이다. 가끔 내담자가 상담선생님이 했던 말을 떠올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말도 내담자의 입으로 표현되며 상담선생님이 개입하진 않는다.



2. 내담자: 나.

서른한 살. 여자.

힘들 때 가끔 마음상담소를 찾아와 폭탄처럼 힘든 이야기를 쏟아낸다. 마음을 털어내는 것이 초점이라 잘 정리되거나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가끔 내담자의 이야기에 상담선생님이 주석으로 설명을 달아준다.


내담자는 폭탄 같은 이야기들을 쏟아낸 후 가끔 결론을 맺지 않고 상담실을 떠난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꼭 결론을 얻기 위해 상담을 받는 건 아니니까. 때로는 털어놓음 그 자체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한다.


마음상담소 회원은 추가되거나 제외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마음상담소에 다른 손님이 찾아올 수도 있고 기존 손님이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회원으로 마음상담소 관리인을 추가할까 하였으나 지금은 필요하지 않은 듯하여 생략한다.



[ 마음상담소의 명칭 ]

이 마음상담소는 '콩순이 마음상담소'로 명명한다.


콩순이는 내담자가 키웠던 강아지의 별명이다(이름은 아니다). 콩순이는 50일도 안 되었을 때 내담자의 집에 와서 12년 잘 살다가 내담자의 엄마 옆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내담자에게 콩순이는 마음의 안식을 주는 존재이다. 비록 곁에 없지만 마음속에 콩순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담자는 편안함을 느낀다.


내담자의 마음속 상담소에 콩순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그런 이유에서 합당하다.


콩순이 마음상담소의 현판에는 콩순이의 발자국 모양 로고가 붙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콩순이 마음상담소를 정식으로 개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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