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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에도 신의가 있다고.

#1.정보는 없지만, P의 좌충우돌 살면서 인테리어 이야기

실은 큰집으로 이사가 가고 싶었다. 점점 커가는 5학년 3학년 아들 둘, 네 식구 살기엔 20평대 아파트는 좁디좁다. 아니다. 좁은 것은 내 참아보겠는데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남편이야 아침 일찍 혼자 준비하고 나가니 화장실동선이 겹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 바쁜 아침, 잽싸게 셋이 치카세수를 완료하면 차례로 화장실 이용을 위해  선다. 그러나 화장실을 차례대로 이용한다는  자체에 어가 있다. 화장실 급함은 남의 차례를 배려할 만큼 이성적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빨리나와라. 급하다. 왜 이리 오래 있냐. 대충 닦아라. 별소리가 다 오가는 걸 들으면 나는 지레 내 차례를 포기하고 만다.  

이런 생생담에도 남편은 꿈쩍하지 않았다. 현재로서 이사에 필요한 추가 대출을 갚아나갈 여건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두 아들의 공부방이 필요한 때이니 각자의 방을 만들어 주게 인테리어를 하겠다는데, 답답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깐 이 양반아.


여튼 나는 또 졌다. 그리하여 곧 호호 겨울인 이 시점에 집 인테리어를 하게 되었다. 살면서 인테리어는 정말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잠시 이사를 하고 짐은 별도로 맡겨야 했으며 인테리어를 끝냄과 동시에 다시 이사를 하고 또 날짜에 맞춰 가구와 전자제품을 착착 넣어 줘야 했다.  피곤하다. 다른 여자들을 보니 인테리어를 하며 열의에 불타 거의 준 전문가 급으로 의견을 내던데, 역시나 나는 불량한 주부다. 기력이 없다. 남편이 짜놓은 일정에 시킨 일만 겨우 하며 나도 노는 건 아니다라는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도 피곤해 죽을 맛이다.

인테리어의 시작은 비움이었다. 죄다 버려야 깨끗이 새로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사당일 다 시원하게 버리면야 간단하겠지만 일부  당근할 수 있는 것은 당근을 해보라는 명이 떨어졌다. 귀찮지만 내가 또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곧잘 한다. 좀 멀쩡한 가구와 아이들 책, 전자제품들을 올려놔 봤다.  요즘 엄마들은 새책을 주로 사주나 싶게 전집에 아무런 입질이 없었다. 우리 애들 어릴 때는 중고나라에 키워드 알람을 두고 뜨자마자 달려들어야 겨우 중고전집을 구매했는데, 며칠을 두고도 연락이 없었다. 번에도 안 팔리면 다음번 재활용날 몰래 버려야겠다마음을 먹고 다른 책들도  더 정리를 해서 올리며, 장님이 미쳤어요 수준으로 가격할인을 세게 때려버렸다. 안 팔리는 거 겨우 팔았다, 돈 쬐끔 받았다,  요정도 멘트를 날리며 당근정리를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머나! 아들들이 애정하던 <마법천자문> 대박 히트를 친 것이다. 50 여권의 마법천자문 만화책을 저렴하게 올렸는데 올리자마자 당근카톡이 20개도 넘게 와버렸다. 당근에서 이런 환대는 또 처음이다.  이럴 땐 선착순이지. 심사위원도 아닌데 굉장히 공정하고 싶은 마음에 1번으로 메시지를 전송한 분과 쿨하게 거래를 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송하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예약 중으로 상태전환을 했다. 그런데 그러고 났더니 더 구미 돋는 메시지들이 오는 것이 아닌가?

판매하시는 영어책과 일괄 구매하고 싶어요.

어머, 저도 일괄 치워버리고 싶지요. 하지만 벌써 판다고 얘기를 끝냈는데 말을 바꾸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죄송하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약간 아쉬웠다.


땅근~또 메시지다.

판매하시는 금액보다 이만 원 더 드리겠습니다. 제가 댁 인근에 있어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이만 원이면 내놓은 다른 전집 한 질은 그냥 버려도 되겠다.  앞번처럼 단칼에 자를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들고 좀 망설였다. 앞구매하신단 분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이분한테 팔까?

죄송해요. 다른 분과 약속이 되어 있어서요.

아쉽지만 거절했다. 모르는 사람과 그저 만화책 당근 거래이지만 신의를 지키고 싶었다. 무엇보다 마법천자문을 목이 빠져라 기다릴 그 집 아들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우리 아들이었음 속상해했겠다 생각이 들어 마음이 쓰였다. 약간 뿌듯한 마음에 남편에게 자랑스레 얘기했더니, 이만 원 더 받고 팔지 그랬냐며 퉁명스레 뱉는다. 안 그래도 한켠 아쉬운 내 마음에 불을 지핀다.


저녁에 집 근처로 차를 가지고 오신 분들을 만나러 나갔다. 내가 수많은 유혹에도 당신들과의 약속을 지켜냈다고 생색을 내고 싶지만 이상한 여자로 볼 것 같아 참아냈다. 그렇지만 입꼬리는 약간 씰룩댔다. 의리 있어.  사람 참 괜찮아. 생각해 본다.


거저 준 것도 아니면서 뒷자리에 있는 아들에게 아줌마 준거다. 마법천자문. 재밌게 봐라라는 생색내는 눈빛 쏴줬다.


옴마!아들이..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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