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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와 고무장갑

# 아드님의 요리수업

큰 아드님께서  방학식 전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학년 마지막 날인 만큼 담임선생님께서 큰 마음을 먹으시고 조별로 간식 만들기를 진행한 듯했다. 꼼꼼한 성향의  선생님은 조별로  어간식을 만들지, 순서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누가 어떤 재료를 준비하고 무슨 역할을 할지를 아이들에게 미리 리포트로 작성하게 하신 모양이다.


준비물 달라며 내게 아드님이 내민 그 리포트엔 어이없는 포인트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역할이고 또 하나는 준비물이었다. 박 누구누구는 조장, 김 누구누구와 이누구누구는 요리사 및 보조, 그리고  우리 큰 아드님은 '노동자'였다. 물론 분류상 조장> 요리사> 보조> 노동자 이렇게 역할을 나눈 것도 참 이상했지만, 이렇게 나눠놓고 보니 '노동자'의 의미가 허드렛일을 다하는 계급의 최하층처럼 느껴진 건 내 사고 체계가 이상해서일까?(나 사회주의자인가?) 물론 나도 노동자이긴 하다만 굳이 이렇게 나눌 건 뭐람. 내 사상을 의심하며 준비물 란으로 넘어갔을 때. 나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재료 한두 개를 준비하면 됐는데 우리 아드님의 준비물은 총 6개였다. 이 녀석이 요리수업에서 맡은 역할은 요리 외 나머지인 것이 확실했다. 노동자의 준비물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오이 간 것(간 오이가 뭐지?), 일회용 접시(친구들  모두),  숟가락(소스바를 용도), 쓰레기봉투, 마요네즈, 도마. (도마? 저 큰 도마를 어떻게 들고 간담?) 

하는 수 없이 다이소와 마트를 전전하며 '노동자'의 애미로서 준비물 다. 왠지 모를 씁쓸함을 숨기고 큰 아드님과 준비물을 확인하는데 새로 산 작은 도마를 보고는 아들이 한마디 한다.

집에 도마 있는데 왜 샀어요? 돈 아깝게
저 큰 도마를 어떻게 들고 가? 무겁게
괜찮아요. 안 무거운데. 한번 쓰고 말 건데 아깝다.

안창피한가?

녀석에 말에 처음 든 생각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이었나? 선생님이 반아이들 모두에게 고무장갑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엄마는 쓰던 고무장갑을 내밀었고 왠지 꼬질해 보이는 그 장갑을 나는 깜빡한 것처럼 집에 두고는 학교 근처 슈퍼에서 새 고무장갑을 사갔다. 예상하다시피 그 고무장갑의 용도는 그저 교실 대청소용이었을 뿐인데, 아무도 내고무장갑을 쳐다보지 않았는데도 나는 새 장갑이 필요했다. 가난의 증거 같은 그 꼬질한 장갑을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으니까.


큰 아드님은 친구들과 만든 샌드위치가 맛있었노라고 했다. 요리 외 모든 역할 담당이었던 만큼 친구들이 쓴 종이접시와 쓰레기마저 바리바리 집으로 싸왔다. 쓰레기는 각자 가져가야지 왜 저것마저 몰아주나 싶어 어이가 어 헛웃음이 났다. 그래도 종이 접시를 닦아 재활용쓰레기통에 분류하는 이 와중에 녀석이 좀 부럽기도 하다. 허드렛일을 하는 역할을 맡은 것도 변변찮은 물건을 학교에 들고 가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녀석은 커서도 나처럼 남을 되게 의식하며 살진 않겠구나. 부럽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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