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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Jun 14. 2024

단 한 편의 동시

목장

 

 사실 오늘은, 이상과 그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음주에 시험을 앞두고 있고, 몸 상태도 그다지 상쾌하지 않기 때문에 글을 쓰더라도 가벼운 묘사나 하려 했다. 한 사람의 비어 있는 물컵에 애정을 따른다는 것은 대단한 책임이 따르는 일로,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대충 해서는 안 되고 나의 시각이 개인적 판단에 의한 사실 왜곡이 아닌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이상의 시나 소설을 한 편 말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나의 엄청난 무지와 마주해야 하며, 숙성이란 얼마간의 고통과 보통을 뛰어넘는 끈기를 요구하는 일임을 절감한다. 나는 한마디로 멀었다.


 하지만 이미 결심한 일이니 무를 수 없다. 무를 생각도 없다. 나는 나의 끈기를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나 자신에게 확인시켜주고 싶다. 그리고 이상이 떠난 후에 그 자리에 언젠가 스며들 새로운 열정의 근원을, 내가 꾸준히, 성공적으로 좇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희망적 믿음을 가지고 싶다. 그건 오직 나만이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숨결 어린 언어와 접촉할 때 내가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고요한 양자의 영광스러운 전자 한 개가 된 듯한 느낌이 뿌듯하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무심한 듯 집요하게 선생님을 쫓아다니는 독자의 고요한 야망!


 선생님은, 절대의 애정에 대한 메마른 형식의 집착을 서서히 관둔 선생님은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얼굴로도 가릴 수 없는 미묘한 흥미를 나에게 내보이며,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그 우주를 수납할 수 있을 만큼 깊은 주머니 안에서 낡은 책자를 한 권 꺼내 내게 건넸다. 노란 격자무늬와 빨강 테두리의 조화가 이목을 확 끌어 잡는 그 잡지는 <가톨릭소년>이었다. 표지의 디자인은 이상 자신이 맡은 것이었다. 두뇌라는, 자신을 천재라고 칭하는 사람의 두피 아래 우주의 심오에 적잖이 당황한 나의 납작해진 자신감을 배려하는, 격려하는 의미의 행동으로 해석해야겠다. <종생기>는 이기고 싶은 마음으로 완성한 역작이라 정말 어지간히 역작이거든, 더 시간을 써야 할 게야.


 관대하게 전자의 부족한 역량을 이해해주는 양자의 눈빛은 참 멋지구나. 이상의 진정한 천재적 기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정시보다는 그의 주 분야였던 아방가르드적 난해시를 읽어야 하며 소설 안에서는, <가벼운 애상감>을 불러오는 <날개>보다도 이상이 자신의 입으로 문학 천년을 잿가루로 돌려버릴 지상 최종의 걸작이라고 일컬은 <종생기>를 관심 있게 훑어야 할 것이다. 한 인간의 처절하고도 처절한 유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숨을 막히게 하는 <종생기>에 대한 은은한 미련을 뒤로하고 나는 노란 격자무늬, 빨강 테두리의 책자를 넘겨 그가 썼다는 동시를 읽는다. 상당히 소년스럽고 순수하다. 키가 큰 해바라기 옆에서 검정 소 한 마리와 하얀 소 한 마리가 평온하게 풀을 뜯고 있는 삽화 역시 이상이 그려 넣은 것이고, 제목은 수수하게 <목장>이다.


사진출처-서울신문


 "송아지는 저마다 / 먼산바래기 // 할말이 잇는데두 / 고개 숙이구 / 입을 다물구 // 새김질 싸각싸각 / 하다 멈추다 // 그래두 어머니가 / 못잊어라구 / 못잊어라구 // 가다가 엄매- / 놀다가두 엄매- // 산에 둥실 / 구름이가구 / 구름이오구 // 송아지는 영 영 / 먼산바래기" 192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의 천재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유서에 못지않은, 아니 더 야망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유서를 뛰어넘는 개세의 걸작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불멸의 예술로 승화하고자 하였던 조선의 독화毒花, 이상. 울분과 조소와 죽음 초월에 대한 핏빛 의지를 잠시 스르르 벗어 내린 한 편의 동시에서는 작가의 꾹꾹 억눌린 착한 마음씨가 느껴진다. 눈물처럼 속에서 억눌려 있는 선의 언어. 위악도 자학도 없는, 아름다운 동시다. 그가 남긴 동시는 <목장>이 유일하다.


 엄마란 존재를 그리워하며 우는 동물은 그게 사람이든 송아지든 마음을 아릿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이상도 친부모와 떨어져 지냈는데, 그 비자발적인 분리 경험에서 비롯된 불안 의식과 잠재된 슬픔은 극복되지 않았다. 소년소녀 독자들을 위한 시였지만, 그것은 사실 이상의 내면 속에 언제나 남아있는, 고독 속에 방황하던 어린 소년에게 보내는 시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물론 추측일 뿐이다. 어떤 마음이 담긴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상의 작품 목록에 예외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동시가 한 편 어여삐 살아있는 게 좋았다. 조선의 악의 꽃, 골고다의 시인, 추방당한 쥬피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되기 전에 분명히 존재했던 한 명의 인간 소년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년 이상의 외로움과 애정에 대한 굶주림이 시 속에서 살아남을 본다. 


 저녁이다. 해가 졌다. 나의 그릇된 언어 때문에 독자에게 전달되는 그의 이미지와 삶이 구부러지고 휘어버릴까봐 내심 걱정도 되지만,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내용을 기입하여 객관적 사실만이 아닌 주관적 이미지도 함께 전달하고 있단 걸 말함으로써 내면의 노파심을 덜어본다. 절대의 애정이 없듯이 절대의 언어도 없다. 내가 나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비어 있는 물컵에 졸졸 따르는 언어는 주관적인 것이며, 거기엔 나의 생각과 감정이 색소처럼 풀어져 있다. 죽은 자는 빈 잔이 되고, 나는 그 잔을 나의 언어로 채워가고, 객관과 주관이 혼합된, 오묘한 색깔을 띠는 내용물을 독자에게 마시라고 권한다. 나는 이상의 독자이자 여러분의 작가이다. 나의 진지함과 시간 투자가 자칫 무의미해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뭔가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걸로 만족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을 '여러분'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인데, 그 뒤를 잇는 좋은 한마디를 찾을 수 없다. 아무튼, 나는 나의 독자들이 어쩌다 자기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아름답고 무익한 일에 빠졌을 때 그것의 가치를 의심하지 말고 그냥 밀고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것은 얼마간의 고립을 불러올 테지만, 고요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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