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서삼태(血書三態)
그해에 나는 하마터면 죽을 뻔한 중병에 누웠을 때 욱은 나에게 주는 형언하기 어려운 애정으로 하여 쓸쓸한 동경 생활에서 몇 개월이 못 되어 하루에도 두 장 석 장의 엽서를 마치 결혼식장에서 화동이 꽃 이파리를 걸어가면서 흩뜨리는 가련함으로 나에게 날려 주며 연락선 갑판상에서 흥분하였느니라.
그러나 욱은 나의 병실에 나타나기 전에 그 고향 군산에서 족부(足部)에 꽤 위험한 절개수술을 받고 그 또한 고적한 병실에서 그 몰락하여가는 가정을 생각하며 그의 병세를 근심하며 끊이지 않고 그 화변(花辨) 같은 엽서를 나에게 주었다.
네가 족부의 완치를 얻기도 전에 너는 너의 풀죽은 아버지를 위하여 마음에 없는 심부름을 하였으며 최후의 추수를 수위(守衛)하면서 고로운 격난도 많이 하였고 그것들 기억이 오늘 네가 그때 나에게 준 엽서를 끄집어내어 볼 것까지도 없이 나에게는 새롭다.그러나 그 추우비비(秋雨霏霏)거리는 몇 날의 생활이 나에게서부터 그 플라토닉한 애정을 어느 다른 한군데에다 옮기게 된 첫 원인이었는가 한다.
욱은 그후 머지 아니하야 손바닥을 툭툭 털듯이 가벼운 몸으로 화구(畵具)의 잔해를 짊어지고 다시 나의 가난한 살림 속으로 또 나의 애정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것같이 하면서 섞여 들어왔다. 우리는 그 협착한 단칸방 안에 100호나 훨씬 넘는 캔버스를 버티어 놓고 마음 가는 데까지 자유로이 분방스러히 창작생활을 하였으며 혼연한 영(靈)의 포옹 가운데에 오히려 서로를 잇는 몰아의 경지에 놀 수 있었느니라.
—첫 단락 <오스카 와일드> 中
그네들은 입을 모아 그 이튿날 그 발신인이 살고 있고 또 경영하고 있는 점포에 왕림하시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좀 나도 따라가서 그 천재의 얼굴을 좀 싫토록 보고 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재는—그중의 한 분이 그것이 확실히 사람의 피라는 감정을 받은 다음 별안간 막 술을 퍼붓듯이 마시는 것을 나는 말릴까말까 하고 있다가 흐지부지 그만두었습니다마는—나이 마흔 가량이나 되는 어른이시라고 그러지 않습디까.
우리들의 예술적 실력은—표현 정도는—수박 겉핥기 정도밖에 아니 되나 보더이다. 나는 거리로 쫓겨 나와서 엉엉 울고 싶은 것을 참 억지로 참았습니다.
—네 번째 단락 <악령의 감상> 中
이것이 내가 평생에 세 번째 구경한 혈서인데 나는 이런 또 익살맞은 요절할 혈서는 일찍이 이야기도 못 들어 보았다.
—마지막 단락 <혈서기삼> 中
나는 첫머리 두어 줄 읽어 내려가다가 욕지거리가 나서 그만두고 대체 피가 어디 있느냐고, 이것은 펜 글씨지 어디 혈서냐고 그랬더니 이게 즉 혈서라는, 즉 피를 내었다는 증거란 말이지요, 하며 저 끄트머리 찍혀 있는 서너 방울 떨어져 있는 지문 묻은 핏자국을 가리킨다. 코피가 났는지, 코피치고도 너무 분량이 적고 빈대 지나가는 것을 아마 터뜨려 죽인 모양인지 정체 자못 불명이다. 그런데 그 장말(章末)에 왈(曰)이, 혈서가 당신에게 배달되는 때는 나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낙원에 가 있을 것이라고……. 요컨대 낙원회관에 애인이 하나 생겼단 말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단락 <혈서기삼> 中
그도 그럴 것이지 W카페 주인은 Y子의 동생 ○○학교 재학하는 근면한 소년학도에게 참 아름다운 마음으로 학자(學資)를 지출하여 주고 있다 한다.
—마지막 단락 <혈서기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