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본다. 이상(李箱)과 나의 역사를. 내가 이상을 처음 접한 것은 2022년 10월로 추정된다. 물론 이상이라는 이름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권태>와 <날개>를 쓴 일제강점기 시인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이상의 책을 내 손으로 직접 구매하여 읽기 전까지, 나는 <날개>의 결말부에서 주인공이 백화점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정도로 이상에 무관심하였다. 여담으로, 이상에 대한 관심이 싹튼 이후에 다시 <날개>를 읽었을 때 나는 보는 사람 하염없이 불안하게시리 옥상 위에 올라선 그에게 떨어지지 마라, 떨어지지 마라, 속으로 빌었다. 떨어져서 그가 죽으면, 물론 소설 속이긴 하지만, 나는 몹시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의사람에 대한 미묘한 애정이 싹튼 것일까. 이상이라는 청초한 신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미로와 같은 길을 거쳐서 결국엔 사람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 살아있는 이웃들의 억눌린 영혼에 대한 막연한 연민으로 번져 갔다. 이상을 사유하는 것은 나의 지성을 훈련시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낯선 타자를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고, 또 내가 지닌 생명의 본성을 거울에 비춰 보듯이 선명하게 응시하는 훈련이다. 생명 연습이다. 나는 별안간 절망하기도 한다. 내가 직관적으로, 마음이 보는 대로 받아들인 그의 표현들이 사실은 폭력적인 세상의 혹독한 눈초리를 피하기 위한 암호였을지도 모른다는 일각의 의견이 나를 들뜨게 하기는커녕 왠지 모르게 두렵게 만드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그의 성애에의 집착이나 괴짜 같은 사생활이 사실은 세상을 속이기 위하여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라는 주장은 나를 그다지 기쁘게 만들지 못한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진짜 이상의 모습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에게 영예로운 본성에 관한 비밀이나 숨겨진 영웅적인 면모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세상을 뒤집을 만한 영웅적인 비밀을 감추고 있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고고한 인간성의 소유자이고, 생에 대한 가련한 열정이고, 수염이 난 아름다운 피에타이다.
경성고공 시절의 이상 (출처: 노년신문)
나는 먼저 이상의 수필을 읽었고, 그 다음엔 소설을, 마지막에 시를 읽었다. 이상 문학의 정수가 짙게 배어 있는 시를 맨마지막에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지금도 잘은 모른다) 이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수필에서 드러나는 이상의 한 인간으로서의 고독이 당시에 어두웠던 나의 마음에 한 올의 동류애로 흘러들어왔고, 나보다 훨씬 불행해 보이는 그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을 통해 나의 길고 긴 밤들을 버티어 나갔다. 나는 이상으로부터 측은지심만을 배운 것은 아니다. 열정. 그의 열정은 늘 핏빛이었다. 오늘 다루어 볼 수필 <혈서삼태>에서는 문학을 향하여 움직이는 그의 마음과 그곳에 내재된 열정의 아름다운 태동을 느낄 수 있다. 쓸쓸한 겨울을 딛고 더 쓸쓸한 봄을 맞이한 나무들이 그럼에도 푸른 거품을 뿜어내듯이 새 생명을 틔워내는 것처럼, 시인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삶 속에서 자신이 취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확고부동한 자세를 깨닫는다. 이상은, 위조 혈서처럼 진정성 없는, 허무한 농담과 진배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의 끔찍함을 느끼고 새빨간 선혈의 문학을 다짐하는 무언의 계기와 만난다.
이상은 어리석은 순애자의 주체되지 않는 날것의 사랑이 비릿하게 스며든, 생생한 혈서를 만남으로써 이에 필적하는 진정성이 없는 예술이란 다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지독하게 진실한 예술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선에 서게 된다. 그의 생명이 새하얗게 전부 사르기 전까지 그의 노력과 고뇌와 준열한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심장이 멈추고 나서야, 토할 수 있는 피를 죄다 토하고 나서야 그는 더는 달릴 수 없는 몸이 되어 펜을 떨어뜨렸다. 그는 자신의 선연한 피를 보고 어떤 아름다움을 느꼈을까. <혈서삼태>에서 이상에게 핏빛 글씨의 순수를 느끼게 한 첫 번째 혈서는, 그와 플라토닉한 우정을 나눈 어느 친구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욱이다. 욱은 이상과 실제로 10년의 우정을 나눈 친구인 문종혁이라고 알려져 있다. 총 다섯 개의 단락 가운데 <오스카 와일드> <관능 위조> 두 개의 단락에 등장하는 욱은, 실제 인물의 생활과 개인사를 많이 닮아 있으나 독자의 직감으로 말하자면, 욱과 이상의 10년 지기 친구란 그 사람이 완전히 겹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상의 소설과 수필에 등장한 문제적인 여인 '임이'가 실제 동림의 모습이 아니었듯이.
보성고보 동창이던 두 사람은 내면의 열정과 사연들을 공유할 수 있는 매우 짙고 가까운 친구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나의 직감상, 실제 이상의 친구와 가상의 욱은 완전히 같은 인물은 아닐 것 같다. 욱을 묘사하는 이상의 문장은 다정함을 넘어 어떤 여성적인 섬세함까지 느껴진다. 실제의 우정의 그림을 그대로 그려냈다기보다는, 모티프가 되는 인물이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의 가상적 존재를 세워 이승에 있기 어려운 아름다운 플라토닉, 애틋한 사랑과 다름없는 순정적 우정을 그려본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황홀한 우정! 이란 말은 성립되기 꽤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와 '욱'의 우정은 황홀하다는 표현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남녀의 사랑에 못지 않은, 친구 간의 황홀한 영혼의 교유 속에서 그들은 백점이 넘는 그림을 그리고, 몰아의 경지 속에서 순수한 영의 포옹을 나누며 예술에의 흥미를 키워간다. 아름다운 문장이 많아 욱이 등장하는 부분을 가장 많이 읽었다.
그해에 나는 하마터면 죽을 뻔한 중병에 누웠을 때 욱은 나에게 주는 형언하기 어려운 애정으로 하여 쓸쓸한 동경 생활에서 몇 개월이 못 되어 하루에도 두 장 석 장의 엽서를 마치 결혼식장에서 화동이 꽃 이파리를 걸어가면서 흩뜨리는 가련함으로 나에게 날려 주며 연락선 갑판상에서 흥분하였느니라.
그러나 욱은 나의 병실에 나타나기 전에 그 고향 군산에서 족부(足部)에 꽤 위험한 절개수술을 받고 그 또한 고적한 병실에서 그 몰락하여가는 가정을 생각하며 그의 병세를 근심하며 끊이지 않고 그 화변(花辨) 같은 엽서를 나에게 주었다.
네가 족부의 완치를 얻기도 전에 너는 너의 풀죽은 아버지를 위하여 마음에 없는 심부름을 하였으며 최후의 추수를 수위(守衛)하면서 고로운 격난도 많이 하였고 그것들 기억이 오늘 네가 그때 나에게 준 엽서를 끄집어내어 볼 것까지도 없이 나에게는 새롭다.그러나 그 추우비비(秋雨霏霏)거리는 몇 날의 생활이 나에게서부터 그 플라토닉한 애정을 어느 다른 한군데에다 옮기게 된 첫 원인이었는가 한다.
욱은 그후 머지 아니하야 손바닥을 툭툭 털듯이 가벼운 몸으로 화구(畵具)의 잔해를 짊어지고 다시 나의 가난한 살림 속으로 또 나의 애정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것같이 하면서 섞여 들어왔다. 우리는 그 협착한 단칸방 안에 100호나 훨씬 넘는 캔버스를 버티어 놓고 마음 가는 데까지 자유로이 분방스러히 창작생활을 하였으며 혼연한 영(靈)의 포옹 가운데에 오히려 서로를 잇는 몰아의 경지에 놀 수 있었느니라.
—첫 단락 <오스카 와일드> 中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동경으로 떠난 욱은 병석에 앓아 누운 '나'에게 충성스러울 정도로 정성스럽게 엽서를 띄운다. '나'의 애처로운 편지들도 욱에게 닿는다. 동경에서 조선땅으로 돌아온 욱은 '나'의 협착한 단칸방에서 함께 기거하며 함께 그림을 그리고 예술적 영감을 나눈다. '나'의 예술적 재능과 열정은 문학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 시작한다. 한 매춘부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 중독된 욱은 밤이 아주 깊도록 '나'를 길거리로 끌고 다니며 자신의 사정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욱의 동정이 매춘부에게 헌상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해피엔드라고 말하는데, 반어적 표현 같기도 하고 이상 스타일의 개그 같기도 하다. 욱은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흐릿한 사진 한 장과 삼팔수건에 적힌 혈서 하나와 싹독 잘라내인 머리카락 한 다발을 '나'에게 신중한 태도로 보여준다. 머리카락은 매춘부의 것이고 혈서는 욱의 작품이다. 손수건 한가운데 가슴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글씨로 '죄(罪)'라고 써 있다. 그것을 본 '나'는 전율하고, 욱에 대한 감정도 깊은 애정의 빛을 띠게 된다.
'나'는 매춘부에게 혈서를 바치는 무모한 로맨티스트의 정신 따위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다소간 냉정한 남자이지만, 친구에게 어떤 형용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욱의 집안 사정은 평탄하지 못했고, 족부에 위험한 절개 수술까지 받은 욱은 무엇 하나 성치 못한 현실에서도 제 욕망의 전사가 되어 사랑을 위해 주저 없이 피를 뿌린다. 평범한 여자와의 사랑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주변에서 어두운 미래를 예견들 하는 술집 창부와의 사랑에 자신의 피와 몸을 헌상한 친구의 비이성적인 태도! 거기서 세간의 손가락질을 겸허히 기다리는 한 남자의 허름한 마음을 느낀 '나'는 되려 감동적인 우애의 눈동자로 친구를 바라본다. 이미 그 시점부터 '나'의 내면에서는, 매춘부에 대한 욱의 정염에 비등한 생명의 욕구가 문학을 향하여 뻗어가고 있었다.
네 번째 단락인 <악령의 감상>에 등장하는 두 번째 혈서를 통해 이상은, 그러니까 수필의 '나'는 피로 써진 정신의 예술을 인식하게 되며 자신의 문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계시받는다. 위조 혈서처럼 기만으로 가득한 가식의 예술, 날조의 예술을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으로 순식간에 무장된 그의 날카로운 두 눈은 필연적으로 '본질'이라는 두 글자를 응시하게 된다. 심장부를 꿰뚫는 창과 같은 본질의 언어로 된 예술을 갈구하게 된다. 안주하는 자의 권태로운 정신도, 가식적인 자의 오만한 허세도 완강히 거부하는 참다운 삶의 정신. 찢고 부수고 몸부림하는 인간의 생동적 정신이 찬연하게 빛나는 창조물, 오직 세상에서 자신만이 주인이 될 수 있는 문학, 번개 치는 뇌수에서 의연히 피어난 보랏빛의 붉은 꽃. 그런 것들. 두 번째 혈서의 수신인도 매춘부이다. '사랑하는 장귀남 씨 / 나의 타는 열정을 / 당신에게 바치노라 / 계유세정월 모일.' 나이 40가량 되는 남자의 머리, 애욕과 정열에 포박된 인사불성의 정신에서 터져 나온 단말마의 비명을 얼기설기 기운 것 같은 너줄너줄한 그 혈서가 '나'에게는 천재의 걸작 쯤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히려 순수한 건 '나'의 마음이 아닌가.)
그네들은 입을 모아 그 이튿날 그 발신인이 살고 있고 또 경영하고 있는 점포에 왕림하시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좀 나도 따라가서 그 천재의 얼굴을 좀 싫토록 보고 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재는—그중의 한 분이 그것이 확실히 사람의 피라는 감정을 받은 다음 별안간 막 술을 퍼붓듯이 마시는 것을 나는 말릴까말까 하고 있다가 흐지부지 그만두었습니다마는—나이 마흔 가량이나 되는 어른이시라고 그러지 않습디까.
우리들의 예술적 실력은—표현 정도는—수박 겉핥기 정도밖에 아니 되나 보더이다. 나는 거리로 쫓겨 나와서 엉엉 울고 싶은 것을 참 억지로 참았습니다.
—네 번째 단락 <악령의 감상> 中
마지막 혈서: 죽음을 부른 위조 혈서
문득, 이처럼 혈서의 어두운 순수성에 대한 비논리적인 미의식을 느끼는 이상에게 누군가 정말 혈서를 보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고개를 든다. 누군가, 아주 단순한 심장을 가진 누군가가 고뇌를 천직으로 삼은 시인에게 정사를 제안했다면? '이 몸도 괴로운 처지입니다. 같이 죽고 싶습니다.' 운운하는 편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제안이라면 그가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물론 아무하고나 정사하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눈물 쏙 빠지게 사랑하는 여인이나 비등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데다아픈 병까지 겹치는 영혼의 동지, 유정 정도가 그와 동반자살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그 누구와도 동반자살을도모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가 동반자살에 대한 관심을드러낸 첫 작품이 <혈서삼태>라고 알고 있다. 이 작품 이후로그는 여기저기서 동반자살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남기게 된다.
만일 미지의 발신자가 끈질긴 노력과 인내로 열 편이 넘는 혈서를 보낸다면 이상도 미지의 발신자를 만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열 편의 혈서를 수신할 때까지 만나자는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것은, 발신자와 만나게 되는 날은 동반자살에의 욕망이 현실이 되는 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난다는 건 허락한다는 것이다. 나의 소설가적인 상상일 뿐이다. 이상은 살아생전에 누구와도 진지하게 동반자살을 도모하지 않았다. 우리 같이 죽을까, 아님 어디 먼데 갈까라는 청혼에 애인은 속마음은 어땠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론 같이 먼데 가는 쪽을 택했고, 이상에게 함께 죽자는 이야기를 들은 유정은 눈물로써 거절하였다. 뭐 그런 상황이었으니,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행위를 끈끈한 연대감 속에서 같이 치르자는 악마적 유혹을 속삭이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이상은 살짝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약속한 날짜와 장소에 나가보니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낡아빠진 양복 안쪽에 고이 접어둔 열 장의 혈서를 꺼내어 펼쳐보는데, 그제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선혈이 아니라, 피처럼 짙은 붉은 잉크로 쓴 가짜 혈서라는 것이. 상실감. 배신감. 위조 혈서는 끔찍한 기만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하나 없고, 지명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곳의 돌다리에서 그는 열 벌의 위조 혈서를 하나하나 잘게 잘게 찢어서 꽃이파리를 흩날리듯이 강물로 날려보낸다. 강물은 꽃이파리 같은 종잇조각을 싣고 유유히 흐른다. 이쯤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과연 혈서의 약속을 두려움이란 망치로 깨부순 비겁성과 혈서의 약속을 그대로 이행하여 세상에 두 자리의 공석을 내버리는 정직성 가운데 더 나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더 비인간적인 것인가. 애초에 바람직하지 않은 질문일까. 그렇다면 넘어가도록 하자. 세 가지의 혈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혈서삼태>의 마지막 이야기는 위조 혈서에 관한 사연이다. 위조에 속은 여자는 죽고 만다.
이것이 내가 평생에 세 번째 구경한 혈서인데 나는 이런 또 익살맞은 요절할 혈서는 일찍이 이야기도 못 들어 보았다.
—마지막 단락 <혈서기삼> 中
'나'는 한 카페의 주인으로부터 '익살맞은 요절할 혈서'를 보게 된다. W카페 주인은 혈서를 보여주면서 사연을 털어놓는다. 얼마 전에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한 여급은 그의 아내인데, 그녀는 너무나 착하고 순하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불쌍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런 착한 Y子에게 흑심을 품은 자동차 운전수 한 놈이 그녀를 살살 꾀이다가 말을 잘 듣질 않으니까 위조 혈서를 보내서 좀 놀라게 한다는 것이, 그만 마음이 약한 Y子가 보고 너무 지나치게 놀라서, 운전수가 정말 죽는다는 줄 알고 그만 겁결에 자기가 먼저 투신하여버렸다는 이야기. 자기 아내만 억울하게 죽고, 위조 혈서를 보낸 놈은 뻔뻔하게 살아서 자동차를 뿡뿡거리고 다니니 원통하고 분하기 이를 데 없다는 W카페 주인의 푸념. '나'는 문제의 혈서를 몇 줄 읽어 내리다가 기가 차버린다.
나는 첫머리 두어 줄 읽어 내려가다가 욕지거리가 나서 그만두고 대체 피가 어디 있느냐고, 이것은 펜 글씨지 어디 혈서냐고 그랬더니 이게 즉 혈서라는, 즉 피를 내었다는 증거란 말이지요, 하며 저 끄트머리 찍혀 있는 서너 방울 떨어져 있는 지문 묻은 핏자국을 가리킨다. 코피가 났는지, 코피치고도 너무 분량이 적고 빈대 지나가는 것을 아마 터뜨려 죽인 모양인지 정체 자못 불명이다. 그런데 그 장말(章末)에 왈(曰)이, 혈서가 당신에게 배달되는 때는 나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낙원에 가 있을 것이라고……. 요컨대 낙원회관에 애인이 하나 생겼단 말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단락 <혈서기삼> 中
피처럼 보이지도 않는 붉은 잉크로 쓴 위조 혈서가 한 순진한 인간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다. 여자의 남편인 W카페 주인의 말에 따르면 그러하다. '나'가 보기에도 혈서는 너무나도 허술한 거짓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따위 가짜 혈서를 제조한 자동차 운전수를 신랄하게 조롱해준다. 그러나 '나'는 이 황당한 투신 사건의 전말에 대한 단일적인 해석을 거부하며 카페의 다른 여급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카페 주인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아내를 착하고 오직 제 남편만을 사랑하는 여자라고 굳게 믿는 카페 주인의 시선과 비교하였을 때, 얼굴 없는 ○○꼬들의 시선은 더 객관적이며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밝혀지지는 않는다.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꼬의 이야기는 사뭇 충격적인데, 실은 카페 주인의 아내인 Y子와 자동차 운전수가 합의 하에 정사를 약속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함께 한강으로 떠났었다는 것이다. '나'는 왜 다른 남자의 아내를 탐내는 운전수의 간교한 거짓에 속아 넘어가 목숨을 버린 여자의 비극적 이야기를 굳이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일까.
그것은 '나'의 문학이 그리고 나아가 본성이 지향하는 방향과 관련된 것이라고 본다. '나'는, 그러니까 이상은 위조 혈서처럼 거짓으로 꾸며진 인간의 모습 이면에 감춰진 추악함을 은근히 폭로하는 희열에서 어떤 시니컬한 만족감을 얻는 인간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보통 이상의 글에서 폭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여성이다. 지금 다루는 수필에서도 폭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 온통 거짓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카페의 여급 Y子이다. 물론 진실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상의 본성은, 남편의 무지한 신뢰 속에서 착하고 순진한 아내로 기억되는 여급의 추악한 본능을 의심하며 그러한 시선을 작품의 대미에 툭 던지는 것이다. 의심은 가능성의 제안이라는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실상 폭로이다. 진실에 대한 두 가지의 가능성—남편에 대한 충실한 애정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카페 여급이 운전수의 혈서에 정신적 충격을 받고 섣불리 투신했을 가능성과 남편의 눈을 피해 새로운 남자와 둘만의 도피를 약속하고 정사를 거행하였다가 여자 혼자만 죽었을 가능성—중에서 무엇을 뒤에 배치하였는가를 생각해도 이상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중요한 것을 뒤에 배치한다고들 하니까. '나'가 남편의 무지한 신뢰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치우며 무심하게 귀를 열어 들은 ○○꼬의 이야기는 참 보잘것없는 인간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카페 주인의 아내인 Y子와 그녀의 비밀스러운 애인인 운전수 두 사람은 정사를 약속하고 자동차로 한강 인도교 건너까지 나갔다. 서로를 마주 응시한 채, 어딘가 결연한 태도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키스를 나누었다. 달콤한 키스. 마비된 이성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로 뜨겁게 젖어든 입술이 다시 메마를 때쯤 용기 있는 Y子는 먼저 신발을 벗고, 스프링오버를 벗고 물로 뛰어들었다. 정말, 뛰어들었다. 그 무시무시한 낙하! 풍덩 몸이 빠지는 순간의 둔중한 음향은 너무 끔찍한 것이어서 남자는 순간적으로 얼어붙는다. 번개 같은 공포가 순간적으로 남자의 머리를 스친다.
그 공포가 남자를 살렸다. 남자는 비겁하게 도망쳤고, 정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여자는 끌어안은 비밀의 돌덩이 같은 무게 때문에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고, 빛 한 점 없는 곳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지 W카페 주인은 Y子의 동생 ○○학교 재학하는 근면한 소년학도에게 참 아름다운 마음으로 학자(學資)를 지출하여 주고 있다 한다.
—마지막 단락 <혈서기삼> 中
정말이지, 어둡고 보잘것없는 인간사의 일면이다. 작은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이 이야기는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종류의 일이다. 위에 인용한 마지막 문장은, 여전히 자신의 죽은 아내를 가여운 기억으로 간직한 W카페 주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죽은 아내의 근면성실한 남동생에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학비를 보태주고 있다. '나'는 그런 카페 주인에 대한 심정을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아내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남편에 대한 가벼운 비소가 느껴진다. 이상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시니컬한 이상도 인간을 사람이라고 칭하며 사람의 정이 그립다 말한다. 그런 양면적인 본성은 어쩌면 인간의 천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살에 대한 유혹, 죽음에 대한 공포, 여성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평생 그를 따라다닌 불행은 그의 문학 속에서 선연하게 빛나고 있지만, 정말 마지막 순간에 이상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순간 자살에 대한 욕망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 되는가. 여성이란 불가지의 영토에 대한 냉소와 애념은, 병에 대한 두려움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 되는가. 뼈밖에 남지 않은 그가 병상에서 어떤 주사를 맞고 별안간 기운이 나서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 그의 가슴을 들먹이게 한 열망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을까. 해야 할 것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자의 미련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미련은 얼마나 처참하고 진실한 것이었을까.
섬찟해지는 것이다.
유아적 순수함, 남성적 준열함, 모성적 섬세함(당당한 시민이니 건실한 가장이니 하는 타이틀을 제 손으로 소각한 그가 막냇동생의 소심한 빈손에 제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쥐어준 것이나 우유 내음이 나는 신부에게 그대는 갓난아기와 같다고 웃음 짓던 모습에서 나는 모성애에 맞먹는 인간성의 다정(多情)을 느끼는 것이다) 등을 두루 지닌 어느 허름한 사나이. 그 허름함이 겉봉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한 세기 후의 독자들의 코를 마비시킬 선혈의 향이 물큰하게 풍기는 황홀한 시들을 가슴에 품고 다녔던 시인. 그는 마음속에는 최후의 칼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한 자루의 펜을 간직하고서 겉으로는 레이몬드 하튼 같이 빙글 웃고는 했다. 위트와 패러독스의 귀재였다. 이제 그는 편안한 안식을 취할 때가 되었다.
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에게 그는 심심찮게 존재의 향기로써 응답을 보내준다. 잉크 냄새, 봄의 냄새, 시(詩)에게 몸이 있다면 날 것 같은 그런 살내.아이러니하게도 죽은 그에게선생의 향기가 풍긴다.건재라는 단어를 나는 맡게 된다.
이번 글에서 중심적으로 다룬 텍스트는 1934년 6월에 발표된 이상의 수필 <혈서삼태>이다. 세 개의 혈서에 대한 이야기로, 이상이 인간 정신의 진정성 그 자체가 되는 문학을 욕망하게 되는 계기를 엿볼 수 있다. 세 개의 혈서 가운데 마지막 혈서는 위조 혈서인데, 수필의 '나'는 위조 혈서를 제조한 남자에 대한 야유적 농담을 실컷 던질 뿐 아니라, 카페 주인의 죽은 아내의 도덕성에 의도적인 흠집을 남김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불신을 넌지시 표출하기도 한다. 세계와 그 세계를 이루는 인간을 대하는 이상 자신의 솔직한 시선이 폭로되는 작품이다. 지금과는 시대적인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매춘부라는 소재가 충분히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이상의 작품 가운데는 매춘부가 등장하는 것이 많은데, 어떤 것은 리뷰를 해도 되나 망설여지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연구자의 시선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상에 대한 추문을 생성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나의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이상의 애독자로서 바라보는 이상의 모습과 정신 세계를 공유해드리고 싶은, 가볍고도 무거운 마음이다. <혈서삼태>는 내가 처음으로 리뷰한 이상의 산문인데, 확실히 시에 비해 길이가 길어서 그런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다. 더 성실한 자세로 자료를 찾아 읽어야겠다.
내가 진정성 있게 들여다보고 탐구하는 대상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유의미한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 그게 나의 소박한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