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쓴 이상, 이상이 쓴 단장
픽션과 리뷰 사이
많은 사람이 나를 불행한 사람인 줄로만 알지만, 나한테는 즐거운 일이 퍽 많았다. 술집 뒷골목에서 친구와 함께 덩치 큰 불량배를 상대로 시비가 붙었던 일이나 아내(지금은 곁에 없는)와 처음으로 같이 목욕을 한 일이나 소일거리 삼아 하는 다방 장사로 이따금 짭짤한 수익을 맛보았을 때. 많은 사람이 내가 살면서 한 번도 큰 돈을 쥐어본 일이 없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나도 가끔은 돈을 벌었다. 나도 한때는 돈 버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돈을 지키는 방법은 몰라서 어쩌다 주머니가 두둑해져도 얼마 가지를 못했다. 돈이 있을 땐 안 오다가 돈이 떨어졌을 때만 찾아와 생활비를 부탁하는 여동생이 기특하게도 이 오빠가 돈을 벌었을 때 미안한 얼굴로 다방을 찾으면, 나는 기쁜 마음이 되어 잡히는 대로 돈을 쥐어주었다. 남은 돈에서 절반 정도는 아내에게 옷이나 화장품을 사라고 주었고, 남은 절반은 내가 밤거리에 뿌렸다. 어느 정도의 낭비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슬픈 눈을 가진 이름 모를 소녀의 옷과 화장품을 사는 데 보태였을 것이다.
돈은 손에 넣을 때보다 손에서 뿌려질 때 조금 더 큰 환희를 만든다. 하지만 나는 돈이 주는 안정과 행복만으로는 살아가지 못하는 놈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구린 지폐 냄새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돈보다도 사랑받지 못하는 나의 시 조각들을 주무르고 싶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나의 시들은 나의 분신 자체인 것 같았다. 이 무슨 끔찍한 자기연민이느냐? 이 우울한 자기연민은 아마도 방금 지나간 각혈의 영향인 듯싶다. 베개에 피가 스며들어 붉게 물들었다. 각혈이란 놈은 정말 성가시다. 건강한 사람의 눈에는 폐병쟁이가 어떻게 보이려나. 죽어가는 시체와 다름없다고 느끼려나. 나는 어제보다 야위었지만 살아있는 데는 지장이 없다. 나는 내가 결핵이란 놈보다 강한 인간이라는 즐거운 착각에 빠져 있다. 나의 시를 알아주는 사람은 참 없다. 그래도 이상(李箱)은 괜찮다. 나의 문학을 포기하지 말라고 독려해주는 동무들이 있고, 슬픈 눈을 가진 소녀가 있고, 어디선가 나만 그리워하고 있는 계집(그 염체 없는)이 있는데 무엇이 쓸쓸하랴.
즐거움은 비처럼 쏟아진다.
어느 날, 나는 아내가 밖에서 나에 대한 모욕적인 험담을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일방적인 모욕을 일말의 의심도 없이 철썩같이 믿는 모양인데, 나는 그런 그들에게 조소를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너의 모욕적인 험담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참 싫다고 아내에게 하소연했는데, 아내는 뭐 그런 것을 신경쓰느냐며 술을 따라주었다. 나에 대한 넘치는 사랑 탓인지, 술잔에서 술이 넘쳐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그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따르고 싶은 만큼 따라주도록 잠자코 기다리는 사이 하나뿐인 내복바지가 젖어서 곤란했다. 이를 어쩐담. 하고 내가 울상을 짓자, 아내는 그러게 왜 잠자코 지켜보고 있기만 하느냐고 되려 성을 냈는데 그녀의 눈빛은 독기를 잃은 채였다. 평소에 독화 같은 것이, 독기 빠진 꽃이 되니 서운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날 밤에 그리고 그 이후의 여러 밤에 우리 내외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알지 못한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아내는 여전히 밖에서 나의 험담을 늘어놓고 다녔고, 말도 없이 집을 비우는 밤이 잦았다. 나는 정말 우울할 땐 슬픈 눈을 가진 소녀들을 찾았다.
"나는 정말이지 후회되지 않는 일이 없네―"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친구에게 술을 사게 했다. 오랫동안 친구였지만, 아무도 그를 괴짜 이상의 친구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 건강하고, 눈빛이 검고, 무뚝뚝한 친구의 정체는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겨두도록 하자. 나는 원래 그에게 나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데, 그때는 이상하게도 석간수가 흐르듯 말이 술술 나왔다. 나는 친구의 얼굴에서 회색의 거친 벽을 보았다. 그 녀석은 오랜 세월을 친구로 지냈는데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당장은 빈털터리지만 내 시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피폐로 얼룩진 삶이지만 나의 눈물진 정신력이 의연한 십자가처럼 버티고 서 있다는 걸 모르는 건, 그래 분명히 잘못은 아니지만, 친구로서는 서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친구에게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불안한, 오로지 나약한 인간으로 비치는지를 느낀 나는 당장 술집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무언가에 압도당한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수치심을 느꼈다.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네나 떳떳한 사람으로 살게나."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술집을 나섰다. 친구의 걱정하는 눈빛을 뒤로하고 나는 비척비척 그에게서 멀어졌다. 흐릿한 달이 미로 같은 밤을 비추었다. 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에게 분노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아주 가끔 올라오는 분노는 늘 알맞은 과녁을 찾지 못하고 나 자신에게 화살을 돌려 조준했다. 나는 그 후로 얼마간 집에 틀어박혀 불빛 어두운 책상 앞에서 필사적으로 나의 사명에 매달렸다. 가끔 내게도 사명이라는 게 있나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그럴 때마다 굳은살이 파이도록 펜을 꾹 쥐었다. 그렇게 하면 또 어떻게든 다음 글자가 써지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분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처럼 순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낮과 밤의 구별은 사라지고, 말라가는 것이 아니라 가벼워지고 있었다. 나만이 느낄 수 있었다. 내 안에서 나를 구제하는 작은 빛의 존재를. 나는 백 개의 시를 완성했고 백 번의 좌절을 겪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공부를 하는 건 체력 소모가 무척 심했기 때문에 이부자리에 누워서 공부를 했다. 그러면 약기운에 금방 몽롱해져서 깜빡 잠이 들곤 했다. 눈을 뜨니 아주 어두운 시각이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문을 열어젖히니, 그때 그 친구가 뜰 한가운데 서서 아스라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스쳤고 의사의 얼굴이 스쳤고 아내와 밀애의 정을 나눈 사람의 얼굴이 스쳤고 죽음의 얼굴이 마침내 다가왔다. 친구는 저승의 사자처럼, 검은 천사처럼 보였다. 뼈만 남은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서 있는 뜰이 가을바람에 부드럽게 쓸쓸하게 흔들렸다. 자네, 아직은 안 돼. 나는 죽을 힘을 다하고 있어. 살아야겠어서. 한 번만 다시 날아야겠어서. 곁에 아무도 없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이제 나는 혼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있어. 나는 요즈음 매일 조금씩 피를 토해. 그러니 친구여 이런 나를 흔들지 말아줘. 이런 나를――믿어주는 한 사람이 되어줘. 나는 그냥 나를 믿어줄 사람이 필요해. 이토록 깊은 밤에 나를 찾아왔다는 건 나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겠지. 자네는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얼마나 신뢰하나. 자네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나, 응? 나는 내가 저승사자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친구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파왔다. 익숙하지만 결코 적응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치받치는 기침에 나는 문을 걸어닫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친구에게 오지 말라고 손짓을 보냈다. 한참 기침을 쏟아내다 불현듯 뜨겁고 물큰한 것이 솟구쳐 올라 짐승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내며 토해버리고 말았다.
혈담이었다. 그런 양의 각혈은 낯선 것이라 잠시 속이 쓰렸지만, 나는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되려 속이 한결 후련해진 듯도 했다. 아직 시가 되지 못한 말들을 너무나 많이 엎질러버린 탓에 속이 우주처럼 공허했다. 나는 잠시 이부자리에 가만히 누워서 2차 폭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것이 피라고 생각하면 피인 것이고, 붉은 팥죽이라 여기면 붉은 팥죽인 것이다. 잉크라고 여기면 역시 잉크인 것이다. 하고 나는 고개를 돌려 더러워진 바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꿈속에서 피를 토했는데 더러워진 건 현실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끼적거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놓았던 것이다. 양수처럼 아늑한 잠 속에서 나는 참 누구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냐. 나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나는 누가 보기에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굳게 닫힌 문을 밀어젖혔다. 나의 꿈을 염탐하고 있던 사람의 얼굴 같이 둥근 달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구름 뒤로 스르륵 숨어들어갔다. 텅 빈 뜰이 가을바람에 부드럽게 쓸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밀려오는 가을공기를 들이마셨다. 나는 한결 나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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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斷章)
실내의 조명이 시계 소리에 망가지는 소리 두 시
친구가 뜰에 들어서려 한다 내가 말린다 16일 밤
달빛이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바람 부는 밤을 친구는 뜰 한복판에서 익사하면서 나를 위협한다.
탕 하고 내가 쏘는 일발 친구는 분쇄했다 유리처럼(반짝이면서)
피가 도면(圖面)(뜰의)을 거멓게 물들였다 그리고 방 안에 범람한다
친구는 속삭인다
—자네는 정말 몸조심해야 하네—
나는 달을 그을리는 구름의 조각조각을 본다 그리고 그 저편으로 탈환(奪還)돼 간 나의 호흡을 느꼈다
(×)
죽음은 알몸뚱이 엽서나처럼 나에게 배달된다 나는 그 제한된 답신밖엔 쓰지 못한다.
(×)
양말과 양말로 감싼 발—여자의—은 비밀이다 나는 그 속에 발이 있는지 아닌지조차 의심한다
(×)
헌 레코드 같은 기억 슬픔조차 또렷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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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든 밤, 나는 책상 위의 촛불을 하나 밝히고 사각사각 펜이 움직이는 소리에 집중한다. 입안에서 달콤한 맛과 향이 난다. 나는 아무도 질투하지 않는다. 더 이상 비참한 것도 괴로운 것도 없다. 그저 쏟아지는 즐거움 속에서 나의 하나뿐인 길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사랑하는 자들이 미처 나를 구제하기 전에 이곳에서 쓸쓸히 백골이 된다 한들, 나는 나의 길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실험과 은밀한 밀애의 혼류 속에서 나는 이따금 몽롱한 정신을 놓아버린다. 곤한 망각 속에서 나는 버려진 들판에 휘날리는 바람이 되기도 하고, 이름 없는 무덤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잠자리로 살아보기도 한다. 고요한 월야를 나지막이 울리는 행복의 종소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방으로 돌아온다. 나는 땀으로 개운하게 씻긴 육신을 늘어뜨리고 시계 소리를 듣는다. 아아 생의 초침은 부러지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기적적인 회생이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오늘은 내일이 되고 내일은 오늘이 되겠지. 나는 그러면 언제까지나 살아 숨을 쉬겠지.
밤의 기진맥진한 눈동자 속에 아름다운 나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슬픔은 단장(斷章) 속에 묻고, 나는 다시 새 밤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