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상의 게으른 독자이다. 이상을 좋아하지만 맨날 그의 글을 읽는 건 아니다. 나도 나의 일상이 있고, 해경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그 말고도 하루에 생각하고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해경이란 이름에 대해서 잠깐 말을 해볼까. 오늘은 여유로운 날이고, 시간은 많으니까. 내가 발음하기 좋아하는 남자 이름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 해경은 거의 최고이다. 바다 해자에 벼슬 경을 써서, 바다와 같이 넓은 곳을 다스리는 고관대작이 되라는 할아버님의 야심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물론 이상은 본명의 뜻대로 살다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는 바다와 닮았다. 고요한 것이, 고요한 밑에 우주 같은 세계가 존재한단 것이.
아무튼, 나는 이상과 그의 세계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감도, 역단, 위독, 조감도,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같은 연작시들을 다 읽기는 했지만, 그 시들은 한 번 읽는다고 다 알게 되는 작품들이 아니다. 오래 들여다보고, 이미 제시된 권위 있는 연구자의 주장에 아이 같은 의문을 품어보고, 오로지 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단상과 반론을 페이지 귀퉁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놓고.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 편의 시를 마음에 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품은 시조차도 반복적인 사유와 공부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옅어지고, 끝내는 흔적 없이 투명해진다. 나의 마음에는 그렇게 반투명해진 시들이 안개처럼 떠돌고 있다.
가슴을 채우는 안개 같은 시의 숨결들은, 마음에 쌓인 다른 짐들과 같은 체적은 없지만 고요히 나를 이루는 일부가 된다. 아이 같은 시인을 좋아하니, 나도 전보다 아이 같은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이상은 나를 웃게 만드는 시인이고, 나를 울게 만드는 시인이다. 그는 사회적 차원에서 영웅은 아니었지만, 개인적 삶의 숭고한 투사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상이 진실하게 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은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에 태어나 광복을 맞이하기 8년 전에 일본의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한많은 마지막 호흡을 끊었고, 그의 대나무처럼 마르고 청정한 시신은 화장된 뒤 아내의 품에 안겨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아내가 뒷날 김환기 화백의 뮤즈이자 반려가 된 변동림이다. 변동림은 김 화백과 재혼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김향안으로 개명한다.
다시 이상으로 돌아가보도록 하자. 이상은 어떤 사람인가.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에 태어나 1937년 건강을 완전히 망친 몸으로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둔 그 날까지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나. 그의 삶은 불행했나, 아니면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었나. 나는 이상의 인생에 대해 많은 걸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무겁게 인상 쓰고 사는 타입은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불행해도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가벼움은 나쁜 의미의 가벼움이 아니라 좋은 의미의 가벼움이다. 여기 이상의 시가 한 편 있다. <청령>이라는 시로, 이 시는 감방생활 후유증으로 몸이 말이 아닌 친구를 위해 친구가 먹고 싶다는 '프랑스식 쿠페빵'을 구하러 세 시간이나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닌 이상 씨의 좋은 친구 소운이, 언젠가 이상이 제게 편지에 써 보낸 단문을 시형(詩形)으로 고친 것이라고 알고 있다. 내가 언젠가 다룬 적 있는 <한 개의 밤>이라는, 슬픔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시도 소운이 편지 속의 글을 나중에 시형으로 고쳐서 발표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소운의 글에서 알게 된 부분이다. 아무튼 <청령>은 내가 무척 애정하는 이상의 시 가운데 하나이다.
건드리면손끝에묻을듯이빨간봉선화
너울너울하마날아오를듯하얀봉선화
그리고어느틈엔가남으로고개를돌리는듯한일편단심의해바라기―
이런꽃으로꾸며졌다는고흐의무덤은참얼마나아름다우리까.
산은한낮에바라보아도
비에젖은듯보얗습니다.
포플러는마을의지표(指標)와도같이
실바람에도그뽑은듯헌출한키를
포물선으로굽혀가면서진공과같이마알간대기속에서
원경을축소하고있습니다.
몸과나래도가벼운듯이잠자리가활동입니다.
헌데그것은과연날고있는걸까요.
흡사진공속에서라도날을법한데
혹누가눈에보이지않는줄을이리저리당기는것이나아니겠나요.
청령은 잠자리라는 뜻이다. 나는 잠자리를 제대로 관찰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어딘가 어설프게 왔다 갔다 거리는 잠자리의 날갯짓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른다. 아름다운 꽃들에 둘러싸인 고흐의 무덤을 아득히 응시하는 이상의 눈빛에 향기 같은 애수가 감돌 것 같다. 이상은 요양 차 내려간 시골에서 이 글이 담긴 편지를 친구인 소운에게 날려 보낸다. 자신도 건강이 힘들어서 가게 된 요양일 텐데, 그곳에서 이상은 이런 동화 같은 풍경을 써서 친구에게 보낸다. 죽음이란 단어와 무관하지 않은 시인에게 무덤이란 결코 아름답게만 그려낼 수 없는 무엇일 텐데, 이상의 조용한 시선은 의연하기까지 하다. 그 조용한 시선 앞에, 소담스러운 꽃들로 꾸며진 고흐의 무덤과 불어오는 바람에 포물선으로 몸이 휘어진 포플러 나무와 한낮의 평온한 풍경 속에서 공중을 나는 잠자리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말투도 아이처럼 맑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비록 무덤을 바라보고 있지만, 이 그림 같은 시에서는 삶에 대한 자그마한 희망도 느껴진다.
왜 하필 고흐였을까.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렸지만 살아생전에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비운의 화가가, 자신의 처지와 어딘가 겹쳐 보이는 심리의 작용 때문이었을까. 확인될 수 없는 추측만 뱉을 뿐이다. 이미 여러 번 읽은 시도, 리뷰를 위해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니 새로운 바람이 한 올 불어오는 듯하다. 나는 이 시가 좋다. 정양 간 시골에서 친구에게 날려 보낸 편지의 전문을 읽어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 편지는 찾을 수 없다. 그래도 이상의 사후에 글을 매만져 잡지에 실어준 소운 덕분에, 이 그림 같은 시가 독자들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청령>은 해바라기 피는 여름에 읽어도 좋지만,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어디선가 가을을 닮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 조용히 읽으면, 그 애수가 더욱 마음에 스며든다.
나는 잠자리를 제대로 관찰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건 내가 잠자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자연친화적인 인간이 되어야 저런 아름다운 글도 뽑아내고 할 텐데, 나는 거미도 파리도 잠자리도 다 싫다. 나비는 너무 예뻐서 싫어할 수가 없는데, 적당한 거리감이 침해되면 얘도 곤란하다. 시적인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가까이 다가오는 건 싫지만, 나비가 아름다운 생물이라는 건 알고 있다. 나비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건지는 몰라도, 그 겉모습이 우아한 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잠자리는 한 번도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저돌적인 왕눈이 생물이지만, <청령>의 마지막 연에서 이리저리 날고 있는 잠자리는 다르게 느껴진다. 왕눈이는 맞지만 사람에게 날아들지 않을 것 같고, 늘 먼발치에서 왔다 갔다 거리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 시인의 마음에 담긴 풍경 속의 잠자리니까. 청천의 영혼이다.
나는 창밖에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다음에는 어떤 시를 다루어보는 게 좋을까 생각하면서. 아니면 게으른 독자에겐 힘든 일이 되긴 하겠지만, 소설을 리뷰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엇이든 다 좋다. 연청색 하늘과 주홍빛 노을의 오묘하고 매력적인 조화는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저녁의 성급함에 금방 끝나버리고 만다. 나는 창문을 열면 아직은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올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마음은 가을 바람을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