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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15. 2024

아침 대신에 눈이 왔으면

수필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중간고사 기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몹시 바쁘다. 시험은 다음주부터고, 시험이 끝난 뒤 닷새 안에 발표문 및 레포트를 3편 제출해야 한다. 미리미리 해두지 않으면 뼈도 못 추릴 것임을 알고 있고, 내 나름대로 노력에 가까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진도는 거북이 속도로 기어가고 과제는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다. 시험에 대한 불안이 시험공부를 놓지 못하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공부를 하는 건 아니다. 자체적으로 세운 사소하고도 어려운 하루의 목표를 하나씩 수행할 때마다 줄을 그어 없애면서 힘겹게 힘겹게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워 오고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강한 카페인을 들이부으며 교재를 달달 외우면서 밤을 지새우고 있겠지. 누군가는 지금도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은 시험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적 향상에도, 내일 아침의 원활한 기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정적인 영향이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나는 지금 좋아하는 재즈 피아노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알맞은 스탠드 조명에 의지해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요즘 수필을 잘 쓰지 않는다. 주로 소설을 쓰고 가끔 시적 감수성이 살짝 넘칠 때면 시인의 가면을 쓰고 시 몇 줄을 적어본다. 그저 내 마음에만 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무모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소설이나 시를 쓸 땐, 글 속에 실제 저자인 내가 등장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이미지들은 날개를 달고, 인물들은 나를 의식하지 않고 서로를 만지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소설이나 시를 쓸 때 즐겁다. 내가 노출되지 않아서 즐겁다기보단, 저자가 후방으로 물러남으로써 더욱 자유로운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즐겁게 한다. 수필은 무척 오랜만에 쓴다. 꼭 혼잣말을 하는 기분이다.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서사 중독인가? (내 소설은 이렇다 할 서사를 갖추고 있지 않다. 실재하는 내가 등장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나에 관한 이야기다. 나의 영혼에 깃든 이미지들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 자체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일 년에 한두 명의 이야기만 계속 다루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하지만 나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어느 정도 서사적 시간이 진행되면 이야기는 마무리될 지점이 다가오고, 어김없이 인물들을 보내주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인물들에게 이름을 잘 붙이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어차피 헤어질 건데, 이름까지 붙이는 정성을 들여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드물게 연작 소설을 집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의 이야기다. 현재 내가 쓰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소설은 이미지와 대사, 눈빛과 감정, 촉감과 냄새가 중요한 욕망과 결여의 텍스트이다. 스토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스토리 중독자는 아닌 셈이다.


  중독된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람의 눈빛이겠지. 사람의 마음이겠지. 나는 사람이 좋고, 특히 나와 직접 교유하는 사람이 좋다. 사회적인,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담은 무언가도 언젠가 써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재로선 실재하는 나 대신 작품을 장악하고 있는 어떤 목소리와 교유하는 특별한 누군가와 비릿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생성해내는 작업이 즐겁다.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소설을 쓸 것 같다. 에로티시즘과 죽음은 언제나 한 쌍이란 생각이 드는 새벽. 에로티시즘이 서정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유한성의 인식이 개입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은 결코 함께 용해될 수 없는 분리된 존재라는 인식의 발견 속에서 의연하게 피어오르는 꽃의 절망, 그게 에로티시즘이라면, 그런 것이 관능이라면 나의 붓은 조금 더 과감해져도 될 것. 간절해서 절망적이고, 절망적이어서 간절한 어떤 이미지는 거의 매번 관능의 언어를 통과하는데,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의 영혼에 각인된 어떤 것이, 슬픈 휘파람 같은 것이 나의 붓을 멋대로 조종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은, 사실 쓸모없다. 나는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손을 휘날릴 테니까.


  나는 서정적인 관능을 지향한다. 그러나 관능이 전부는 아니다.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제시하는 에로스적 충동과 타나토스적 충동 이외에 뭔가 고매한 나만의 정신적 목표를 발굴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시인 이상이, 태생적으로 움켜쥔 에로스적 충동과 타나토스적 충동 이외에 모더니티의 시적 추구 작업이라는 자신만의 고매한 목표를 발굴해냈듯이. 나도 뭔가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의 지평을 넓혔는데, 첨예한 지적 작용을 통한 고전적 언어 질서의 붕괴와 같은 차원뿐만 아니라 꿈을 헤매는 듯한 서술이 일품이다. 어항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먹먹하고도 몽롱한 서술. 때론 감정으로만 이루어진 사람인 듯 눈물을 허비하기도 한다. 나는 그 시인의 거의 모든 걸 사랑한다. 이상은 누군가에겐 무기력한 지식인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겐 진실된 열정의 투사이다.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는 그게 삶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눈동자를 따르면 되겠지. 나도 이상처럼 진실된 사람으로 살아야지. 진실하게 나의 본질을 따르는 작업에 단정한 명칭을 붙여줄 때까지 나를 이끌고 가보리라. 멀리 멀리 가보리라.


  네 시가 넘었다. 다섯 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건지 나조차 잘 헤아릴 수 없는 이 ‘되는 대로’ 수필을 쓰면서 잠이 깨 지금은 눈빛이 또렷하다. 하지만 머잖아 수초처럼 부드러워질 것이다. 이만 자자. 더 쓸 말도 없고. 이상은 안 계시고. 동이 틀 때까지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는 모두 자고 있고. 다자이라도 살아났으면. 아니면 아직 브런치에 언급한 적 없는, 내가 처음으로 존경한 소설가분께 일 년 만에 편지를 써볼까. 하지만 지금은 최상의 문장을 쓸 수 없겠지. 다음으로 양보하자. 아주 가까운 다음으로. 내일은 수업이 하나밖에 없는 날이라 평소라면 여유가 있지만, 시험 전주라 수업이 끝난 뒤에도 도서관행이다. 아마 적지 않은 학생이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지 못하고 도서관 계단을 오를 것이다. 같이 시험 기간을 겪고, 나와 같은 가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쓸쓸하지 않다.









사진: UnsplashKseniya Lapte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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