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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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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스무 살 나는 사랑한 적 있소

나보다 열네 살이 많은 남자였소


열다섯 혹은 열여섯 살이 더 많았다고 해도 사랑했을 거요.

감정은 늘 흥건에서 한 방울이 모자랐소.

그래도 가슴팍을 축축하게 적시기엔 충분했소.


죽음의 숲에서 태어난 그 사람은 달빛이 어미였소.

조약돌 같은 남동생이 있었는데 목을 졸라 죽였소.

슬픔을 감춘 얼굴로 담담히 최후를 기다리는 남동생에게

너는 더 귀한 것으로 태어나거라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소.


가엾은 남동생은 은빛 식물로 다시 피어났소.

더 고귀해진 것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소.

자신의 손에 죽은 동생이 다시 살아났는데도 그는 초연할 뿐이었소.


만월을 가리키며 저 팽팽한 노기가 느껴지느냐며

내게 나직이 묻던 그 사람.

나는 차라리 당신을 죽일까 생각했소.

만월은 잦았고 만월이 뜨는 밤마다 조금씩 야위던 뺨이었소.


어느 밤 그는 내게 손바닥을 조용히 내밀며

크고 붉게 罪(죄)를 새겨달라고 부탁했소.

날카로운 것을 쥐어본 적 없는 나이기에 오래 망설였소.

키스와 다그침에 못 이겨 나는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했소.

글씨는 작았고 점점 붉어졌소. 붉음이 과했소. 그런 밤이었소.


과한 붉음은 내게 재채기를 유발시켰소.

나는 우는 대신 재채기를 하였소. 장기의 위치가

재채기 한 번에 엉망이 되었소.


달빛의 머리카락 속죄하듯 빗어주던 그 사람의 손

작고 선명한 罪가 새겨진 손바닥.

연인의 머리카락 빗어주듯 어미의 머리카락을 빗어주었소.

그가 그런 오묘한 속죄의 시간을 보낼 때 누군가는 다리에서 울었고

누군가는 담배의 관능을 목격했고, 누군가는 거칠게 요람을 흔들었소.


작은 존재가 와 여자를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자

거칠게 요람을 흔들던 손이 서서히 멈추었소.

그는 아름다운 이였소.

야망과 슬픔을 가진 눈매는 어딘지 나를 닮았소.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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