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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Oct 29. 2024

겨울이 오는 소리

짧은 소설


 나는 남자의 단단한 무릎뼈를 가벼이 잡았다. 내 손바닥의 온기가 남자의 무릎으로 스며들었다. 남자는 요즘 관절이 시린데 내가 잡아주니 무릎이 따뜻해져서 좋다고 그랬다. 무릎이 따뜻해지는 감각은 기분이 좋은 것이구나. 나는 남자를 통해 알았다. 나는 손바닥을 무릎뼈에 붙이고 원을 그리듯이 살살 문질렀다. 남자는 요즘 관절이 아픈데 내가 만져주니 무릎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고 그랬다. 무릎이 부드러워지는 감각은 은은한 미소를 부르는구나. 나는 남자의 얼굴을 통해 알았다. 겨울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남자의 무릎뼈를 노크하듯이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조금 더 세게 똑똑똑 똑똑똑 두드렸다. 남자는 아프다고 그랬다. 나는 얼른 남자의 무릎에 키스를 하며 미안함을 전했다. 남자가 조용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넓적한 손바닥이 나의 뒷머리를 헝클였다. 나는 나에게 다정한 남자에게 지금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어두운 감정을 죄다 털어놓고 싶다고 느꼈다.  마음속의 미움과 구질구질한 후회와 우울을 남자에게 전부 말한 다음 남자의 손을 잡고 무작정 집을 나서고 싶었다. 밤의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꼭 잡은 남자의 손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밤엔 죽은 형이 생각난다."


 남자에게 죽은 형이 있었나.


 내가 묻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무릎 장난을 그만두고 형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었다. 남자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잠시 후에, 화가가 되고 싶던 사람이었어, 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남자에게 나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다 털어놓고 싶었는데, 이미 그는 자신의 아픔과 대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남자가 자신의 형을 떠올리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남자의 형이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남자처럼 차분한 이목구비에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남자는 담담한 눈빛으로 자신의 형은 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초연한 사람이라도 죽음이 방문 앞까지 다가오면 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형은 그런 게 없었지. 형은 끝까지 초연했어. 웃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어. 그저 어둑한 방안에 틀어박혀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붓으로 그림을 그렸지. 형은 풍경이나 자화상을 그렸어. 형의 그림은 전부 수채화였지. 남자는 술술 말했다.


 "형이 보고싶어?"

 "당연하지."


 나는 괜한 걸 물은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남자의 무릎팍을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또 나를 보고 웃었다. 형은 과묵한 편이었어. 남자는 말했다. 그럴 것 같았다. 남자의 형제니까. 남자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림의 제목을 천천히 되짚으며 읊조렸다. 우기의 꿈을 꾸는 사막, 눈 덮인 산, 겨울의 고요, 바람과 언덕 등등. 평범한 제목도 있었고 신기한 제목도 있었다. 나는 남자의 형의 그림을 본 적도 없건만 제목만으로도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흰 눈이 조용히 내리는 산의 고요. 겨울의 고요. 그 안에서 남자와 살고 싶었다. 월광 아래서 따스한 백차를 마시며 지겨운 미움의 감정도, 후회의 감정도 잊고서 살고 싶었다. 하루만이라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나는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남자의 이야기를 조금 놓치고 말았다. 남자는 형의 학창시절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나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형은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고 했다.


 "형에 대한 존경심이 유독 강한 후배가 있었어. 그 후배는 형의 그림과 그림을 대하는 형의 태도를 흠모했지. 그는 같은 미술학도였어."


 남자는 계속 말했다.


 "그 후배는 형이 죽은 뒤에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 나는 궁금했어.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형은 형이고 그는 그인데."

 "상실감 때문이 아닌가?"

 "상실감 때문은 아니야. 그는 형의 그림 없이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거야. 때론 형의 것을 사랑하고 때론 형의 것을 부정하면서 자신 나름대로 고뇌한 흔적이 늘 작품에 배어 있었어. 형은 그가 자신을 깊이 연구한다며 좋아했지. 형의 그림은 그에겐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어."

 "그래서 형이 죽은 뒤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거라고?"

 "지금은 어떤지 몰라. 찾으라면 찾을 수 있지만 내키지 않아서. 형은 그를 좋아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어."


 죽은 그의 형이 바깥을 떠도는 듯 바람소리가 은은했다.


 "나도 당신 형이 보고싶다."

 "정말?"

 "당신과 닮았을 테니까."


 나는 형만큼 좋은 인간이 아니야. 남자는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나는 형처럼 죽지 않을 거야. 그는 방금 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툭 뱉었다. 나는 남자의 거친 손에 내 손을 포개면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진지하게 확언했다. 그제야 남자는 다시 차분한 미소를 되찾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겨울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눈이 내리는 산중턱의 외딴 집 지붕에 매달린 풍령이 흔들리는 소리였다. 향긋한 백차의 향기가 퍼지는 소리였다. 나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고 불현듯 남자와 포옹을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옹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겨울이 오고 있었고 우리는 타인의 체온의 도움이 없이는 밤을 날 수 없는 허약한 육체들이었다. 남자와 나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나는 담담한 얼굴로 남자의 등을 천천히 다독여주었다. 그가 미소를 짓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 겨울, 많이 춥겠지?


 응.

 그러니까 겨울이 지날 때까지는 이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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