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이슥한데 나는 사실 그 친구와 이런 회화를 했다.는 이야기를 염치 좋게 하는 것은 요컨대 천하의 의좋은 내외들에게 대한 퉁명이다. 친구는
"여비(旅費)?"
"보조래도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지만."
"둘이 간다면 내 다 내주지."
"둘이."
"임(姙)이와 결혼해서―."
여자 하나를 두 남자가 사랑하는 경우에는 꼭 싸움들을 하는 법인데 우리들은 안 싸웠다. 나는 결이 좀 났다.는 것은 저는 벌써 임이와 육체까지 수수(授受)하고 나서 나더러 임이와 결혼하라니까 말이다.
나는 연애보다 공부를 해야겠어서 그 친구더러 여비를 좀 꾸어달란 것인데 뜻밖에 회화가 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
"그럼 다 그만두겠네."
"여비두?"
"결혼두."
"건 왜?"
"싫여!"
그러고 나서는 한참이나 잠자코들 있었다. 두 사람의 교양이 서로 뺨을 친다든지 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그런 것이다.
"왜 내가 임이와 그런 일이 있었대서 그러나? 불쾌해서!"
"뭔지 모르겠네!"
"한 번, 꼭 한 번 밖에 없네. 독미(毒味)란 말이 있지."
"순수허대서 자랑인가?"
"부러 그러나?"
"에피그램이지."
암만해도 회화로는 해결이 안 된다. 회화로 안 되면 행동인데 어떤 행동을 하나.
물론 싸워서는 안 된다. 친구끼리는 정다워야 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의 공동의 적을 하나 찾기로 한다. 친구가
"이(李)를 알지? 임이의 첫 남자!"
"자네는 무슨 목적으로 타협을 하려 드나."
"실연허기가 싫여서 그런다구나 그래둘까."
"내 고집두 그 비슷한 이유지."
나는 당장에 허둥지둥한다. 내 인색한 논리는 눈살을 찌푸린다.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나는 인색하다.
친구는,
"끝끝내 이러긴가?"
"수세(守勢)두 공세(攻勢)두 다 우리 집어치우세."
"엔간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일세그려!"
"누구든지 그야 타락허기는 싫으니까!"
요 이야기는 요만큼만 해둔다. 임이의 남자가 셋이 되었다는 것을 누설한댔자 그것은 벌써 비밀도 아무것도 아니다.
위는 이상의 <EPIGRAM> 전문이다. 이상이 동경으로 떠나기 몇 달 전인 1936년 8월 <여성>지에 발표되었다. 딱히 해석이 필요한 글은 아닐 것이다. 임이란 여자를 두고 이상과 그의 동무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상은 연애보다는 공부를 해야겠어서 친구에게 여비를 꾸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친구는 이상더러 임이와 결혼하고 함께 동경을 가라고, 그러면 자신이 여비를 내주겠다고 말한다. 이상은 그런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임이의 육체를 가진 적 있는, 임이의 전애인인 동무가 하는 상황이 묘하게 기가 막힌다. 두 남자는 대치 상황에 놓이지만 결코 누구도 먼저 상대방의 뺨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친구끼리는 정다워야 하니까.
이상의 친구는 서로를 상대로 구질구질한 기싸움을 벌이는 상황을 타파하고자 공공의 적인 이(李)를 회화의 도마 위에 내던지지만 이상은 친구와 한편 먹기를 거부한다. 서로 싸우는 것도, 서로 한편이 되어 싸우는 것도 다 물 건너간 상황에서 명예에 타격을 입은 건 바로 임이다. '임이의 남자가 셋이 되었다는 것을 누설한댔자 그것은 벌써 비밀도 아무것도 아니다.' 방정맞은 친구의 발설 때문에 임이의 남자가 셋이었다는 사실이 독자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친구는 이상이 짜놓은 판의 충실한 말일 뿐, 임이의 미흡한 정조를 위트의 어조로 비난하는 건 다름 아닌 이상 자신이다. 그야 <에피그램>은 이상이 쓴 글이니까. 이상이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독자는 임이의 남자가 하나인지 셋인지 알지 못했을 거고,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거다. 임이는 자연스럽게 이상의 두 번째 아내인 변동림을 떠오르게 하는 이름이다. 동림이 준엄한 태도로 비난의 철퇴를 내린 '꽁트식 잡문'에 분명 이 <에피그램>도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임이란 여인이 허구의 문학적 창작물이었다고 해도, 이상과 동림의 관계를 알고 있는 독자가 이 글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임이란 여인에게서 이상의 애인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왜 이랬을까?
내게 이상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건, 이상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나는 이상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이상의 창작 태도, 누가 봐도 자신의 애인이 연상되는 허구적 인물의 내밀한 과거사를 대놓고 까발리는 행위는 객관적으로 비난의 소지가 있다. 이상이 이런 글만 쓰는 남자였다면 천재라는 수식어는 결코 달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이 남긴 독자적인 문학의 경지는 따로 존재하고, 곁가지 또는 플러스 알파 같은 느낌으로 이런 골 때리는 잡문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골 때리는 잡문도 재밌게 읽는 편이다. 내가 그의 아내의 입장이 아니라서 그런가? 사람은 모든 타인의 입장을 수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임이의 입장은 수호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의 창작 태도가 누군가에겐 분명히 상처를 주는 것이었음을, 임이와 동림 두 여인에게 <에피그램>과 같은 글은 아주 무례하게 다가왔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말 그는 왜 그랬을까. 나는 이상이 동림을 사랑한 것을 알고 있다. 여러모로 폐허가 된 자기자신에게 찾아온 한 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그런 소중한 상대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이상도 나는 참 흥미롭고, 이상이 죽은 뒤 한 번도 성묘하러 가지 않은 동림의 알려지지 않은 속마음도 궁금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남의 애정사. 내가 깊게 관여할 부분은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의 아담한 독자단에게, 내가 흥미로워하는 작가인 이상의 평범하지 않은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깃든 <에피그램>이란 글을 소개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평범하지 않은 걸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사람은 가끔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 받을 짓을 하지 않는가. 동림의 입장은 아니어도 여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이상의 애인비하적 창작 태도는 어딘가 어리광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나? 안 될 것도 없지. 여긴 온전히 나의 공간이니. 나는 솔직히 전혀 관대한 사람이 아닌데 이상이란 작가에게 유독 관대함을 보인다. 그러니까 나도 평범한 정신 한켠에 평범하지 않은 어떤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이상이 <에피그램>에서 보여준 것은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밀도 높은 대사 구성력, 그리고 작가만의 이단성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기껏 찾은 새로운 사랑에게 미움을 살 만한 짓으로 고료를 벌어서 그녀와의 희망적인 미래에 작게 보탠다, 그러나 여자란 존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지는 않는다...... 고 얼추 작성해볼 수 있는 한 남자의 마음. 위선이 없어서 순수하다. 전혀 관계 없는 내가 상상력으로 변호를 해보자면, 그는 <에피그램>처럼 두고두고 말이 나올 수 있는 글을 쓸 때 어떤 치밀한 계산을 선행한 것이 아니라 그쪽으로 뻗쳐가는 상상력을 그저 나비 좇듯이 열심히 좇아가면서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써나간 것이 아닐까. 그는 마음 속에서 그와 동무가 등장하는 한 편의 꽁트를 관람하고 있었고, 그걸 고료라는 아름다운 보상을 위해 글로 한 번 재현해본 게 아닐까. 결과는 가까운 이에게는 배신감을, 이상을 읽어보겠다는 독자들에겐 불필요한 오해와 동정(?)을 남겼지만. 멋대로 활개치는 펜촉의 재기발랄. 서성이는 죽음을 잊기 위한 찰나적인 유희였을지도 모른다.
이상은 짧은 글 속에도 이상다운 느낌을 깃들이는 데 능숙하다. 백 편의 글이 어지러이 흩뿌려진 바닥에서 그의 글을 오로지 문체와 분위기에 근거하여 찾으라고 한다면 나는 웬만하면 오답을 내지 않을 것이다.
이상이 남긴 아주 짧은 글 가운데 재밌는 것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화초와 내 집의 화초>
나는 지금 집이 없습니다. 물론 화초도 없습니다. 그전 우리 집 뒷결이 꽤 넓어서 화초가 많았읍니다. 그러나 화초를 좋아하지 않았나 봅니다.
옥잠화라는 꽃이 있읍니다. 미망인같대서 좋아합니다. 혹 그 꽃이 가다가 눈에 띠이면 나는 좀 점잖지 못한 눈으로 보는 버릇이 있읍니다.
위의 단문은 1936년 5월 <조광>에 실렸다. 어느 부분이 재밌다고 한 것인지 대충 느낌이 올 것이다. 옥잠화라는 꽃이 지나가다가 눈에 띄면 좀 점잖지 못한 눈빛으로 보게 된다는 다소 몰염치한 독백. 이상이 미망인 같대서 좋아한 옥잠화는 어떻게 생긴 꽃일까, 하고 찾아보았다. 가늘고 길게 늘어진 흰 꽃봉오리가 미망인의 슬픈 목덜미처럼 느껴진 걸까? 다소 몰염치한 성욕을 가진 남자의 마음은 활짝 피어나는 장미보다는 어딘가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는 옥잠화의 가녀린 자태에 이끌리나보다. 그런데 비밀을 말해주자면 여자에게도 그런 비슷한 몰염치한 성욕이 아예 없지는 않다. 아름답게 다친 마음에 이끌리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타자, 연대, 치유, 사랑과 같은 단어를 염두하고 소설을 읽고 쓰는 내가 이런 색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상이 오래 전에 옥잠화라는 꽃을 두고 남긴, 다소 몰염치한 인간적인 고백 덕분이다. 여기엔 타자에 대한 따뜻한 관찰도, 치유도 사랑도 없지만 지나치게 솔직한 '인간'이 있다. 보편으로 환원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개인의 수수하고 거친 민낯. 나는 보고 있다.
이상의 위상을 높이는 글을 많이 쓰고 싶은데, 가끔 방향을 잘못 잡는다. 그냥 자유롭게 떠들리라. 높다, 위대하다, 천재다, 같은 표현만이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니까. 해가 졌다. 창밖에서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던 키 큰 은행나무는 어둠 속에 파묻혔고 세상은 옷을 바꿔입었다. 어둠을 받아들일 때이다. 예정에 없던 이상의 글 두 편을 다루게 되었는데, 거의 의식의 흐름대로 쓰느라 이상한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서 약간 후회도 된다. 나는 이상에 대한 글을 쓸 때 늘 구름 위에 누워 있는 이상에게 올려보내는 마음으로 쓰는데, 이 글은 올려보내지 말고 나와 독자들끼리만 봐야겠다. 하하 그는 귀가 간지럽겠지. 이상은 위에서 무얼 할까? 이젠 퍽 어른이 된 눈길로 아무렇지 않게 옥잠화를 바라보면서 초겨울의 추위를 실감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