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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Nov 11. 2024

하루의 마무리

수필


  하루를 끝맺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 내게는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으로 두 시간이라는 적지 않는 시간이 주어졌었는데, 앉아서 멍하니 생각을 더듬고, 유튜브에서 <정년이> 클립을 넋 놓고 보느라 시간이 금방 지나버렸다. 소설을 끄적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쉽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하루를 끝냈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원래 드라마를 잘 보지 않고 영상 시청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책도 편독이 심한 편이지만, 드라마나 영화보다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내가 글을 쓰는 것만큼 좋아하는 일은 공연 관람인데 편독하는 성향이 여기에서도 나타나 새로운 배우나 공연에 도전하는 게 쉽지는 않다. 이미 좋아하는 공연, 배우, 작가, 작품 등을 뛰어넘어 새로운 취향을 발굴하고 그 속에서 이전에 마주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찾아내는 것. 다소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분명 필요한 삶의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깃드는 새로움이 즐거울 뿐이다. 위 문단에 슬쩍 언급한 <정년이>가 요즘 나의 작은 관심과 즐거움인데, 물론 나는 그 드라마를 정주행하지는 않았다. 그냥 유튜브에서 쇼츠나 클립으로 잠깐씩만 본다. 그런데도 어느덧 그 드라마에 스며들었는지 아까 밤에 유튜브에서 옥경과 혜랑의 이별 장면을 보고는 아 그래도 저렇게 떠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나는 혜랑의 마음이 슬펐다.


  드라마 정주행에 유독 어려움을 느끼는 나이기에 <정년이>도 정주행은 불가능할 것 같지만, 유튜브에서는 쇼츠나 몇 분짜리 클립 영상으로 간간이 챙겨볼 것 같다. 그 드라마에서 소녀 팬들이 국극 배우들의 매력적인 로맨스 연출을 보고 호들갑을 떨면서 환호하는 장면이 뭔가 귀엽고 좋았다. 나도 배우들의 로맨스 연기를 보고 가슴이 일렁이는 나머지 가슴에 손을 가만히 얹고 있어야 했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지르지 못했던 환호를 대신 질러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여튼 사람들은 로맨스를 좋아한다. 로맨스를 좋아하는 본능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나도 로맨스를 좋아하지만, 로맨스 영화나 대놓고 로맨스의 기류가 흐르는 연극, 뮤지컬은 기피한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로맨스, 내가 싫어하는 로맨스의 구분은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자기 직전이라 너무 풀어진 듯하다.


  <정년이> 쇼츠와 클립을 챙겨본 것 말고도 주말 동안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였다. 어젯밤은 안에서 솟구치는 울음의 열기를 의연히 제어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오늘밤은 몇 살은 어려진 기분이다. 그냥 별 생각이 없다. 인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행복이란 것은 거창한 감정이 아니라 슬프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지금과 같은 상태가 아닐까. 요즘 나의 생활은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번주도 과제가 무척 많아 버스 안에서도 시집과 논문을 놓을 수 없을 듯하다. 교수님의 수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시집들과 일 년 전만 해도 팔자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 논문들. 아직 독서의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 잡히지 않은 나는 한 시간이 지나면 몸이 쑤시고 슬쩍 유튜브를 켜고 싶어진다. 그럴 때 보는 정년이 쇼츠나, 그럴 때 듣는 재즈 피아노는 최고의 휴식이다. 새로운 시집들과 지성의 빛이 깃든 각종 논문들도 재미 있지만, 나는 이상의 글을 읽을 때 가장 행복하다. 행복? 세상에 행복이란 단어를 이런 데 흘리다니. 그런데 행복이 맞는 것 같다. 보통 자아 비대는 오만으로 자아 축소는 겸손으로 다가오는 게 일반적인데, 이상의 자아 팽창은 전혀 오만의 빛을 띠지도 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신비한 점이다.


  자기가 가진 자아의 크기는 억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아의 의식적 축소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타고난 선한 인간성, 농담을 서글픈 색으로 물들이는 재능, 타고난 비폭력성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쯤하고 그만 잘까? 가족은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자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들 조금만 불행하고 더 잦게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불행이 뭐 별거인가. 행복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악마적인 형상의 어떤 것이 아닌, 그저 잠시 행복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헤매는 상태. 더 풍성해지기 위해 잠시 빈곤해지는 시간. 작은 카나리아의 형상을 한 행복을 창밖으로 날려보낸 다음, 그것이 다시 날아 돌아올 때까지 창가에 기대 향긋한 말차를 마시며 호젓한 기분을 느끼는 불행도 불행일 것이다. 내게 오는 불행의 8할은 그런 불행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향긋한 말차 같은 불행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나약하게 지내왔던 건 아닌지. 나는 더 이상 나 혼자만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두가 힘들고, 모두가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힘차게 날아간 자신의 작은 카나리아를 기다리고 있다. 비스듬이란 말은 그러니까 슬픔을 띤다. 그건 슬픈 단어다. 하지만 언젠가 카나리아는 새침한 날갯짓으로 다시 우리의 창가로 돌아올 것이고, 우리는 새장의 덧없음을 곱씹으며 먼 비행에 지친 카나리아를 손 위에서 가만히 쉬게 해주겠지. 그저 그럴 뿐이겠지. 이제는 정말 자야 할 것 같다.


  또 한 주가 시작되었다. 달력은 고장 두 장 남았다. 시간이 너무 빨리 달려간다. 나는 시간을 붙잡고 싶다. 시간이 ‘그’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라면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작은 카나리아 한 마리가 지친 날개를 부리로 다듬고 있는 나의 창가로 그를 데려가고 싶다. 그를 창가에 앉히고 같이 불행을 상징하는 향긋한 말차를 나눠 마시면서 행복도 불행도 아닌 시간을 보내고 싶다. 어쩌면 행복과 불행의 혼재일지도 모르는. 그렇게 일 년에 딱 하루를 더 추가시킬 수 있다면. 덧없는 잠꼬대겠지. 달력은 달력의 사정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함부로 하루를 추가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일을 허비하지 않고 소중하게 경영하는 일 뿐. 그렇게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경영해 나가면, 한 해가 정말 끝날 무렵이 와도 내게 하루가 더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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