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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Dec 05. 2024

묵묵함의 기록이었으면


  글을 쓰면 잔잔하던 마음이 휘저어지는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안정에서 불안정의 상태가 되겠다는 의미이다. 사회적, 친교적 자아의 얼굴을 잠시 내려놓고 맑은 물가에 어른거리는 나의 민낯을 오래 들여다본다는 의미이다. 고독과 대면하고 존재 주변의 소음의 볼륨을 낮추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는 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글을 짓고 싶다는 마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전부 장식인 것 같다는 생각. 하나씩 불필요한 장식을 벗어내리고, 베일을 벗듯이 그렇게 벗어내리고 내가 가진 것만으로 구성된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응시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나의 실생활에서의 어투는 점점 차분해지고, 글을 쓰는 태도 역시 절제를 깨달아가고 있다. 절제가 없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때로, 절제라는 허울 좋은 말로써 내면의 갈망의 질주를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나의 글이 애상적인 지옥의 초상을 닮았다고 느낄 때, 조금 설레고는 했다.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미적 갈망이 찰나적으로 충족되는 느낌. 그러나 나는 애상적인 지옥의 풍경만을 사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눈물 젖은 남루한 수염에 붙은 죽어가는 나비의 이미지와, 새끼를 출산한 어미개의 마른 몸을 걱정하는 따뜻한 사람의 눈길과, 매일같이 반복되는 남루한 호흡에 지쳐버린 사람의 어미개처럼 마른 등을 귀애하듯 다독여주는 손길 같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다독임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라 그것을 더 갈구하기보단 다독임 받지 못한 이의 등을 향해 자꾸 손을 뻗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지옥을 사모하는 듯한 나의 한때 작풍은, 그러한 나의 평범한 선량한 베풂의 욕구를 마냥 선량하지 않은 것으로, 조금은 매혹적이고 문제적인 것으로 장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장식의 흥분에서 벗어나 전보다 고요한 눈동자로 나의 세계를 응시하고 있다. 나의 세계는 생각보다 가난하고 또 생각보다 가난하지 않다. 나는 내가 타고난 기질을, 말하자면 기형적으로 극단화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즐거운 졸문을 써 남겼는데 지금에 와서 그러한 글들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많은 글을 소리 소문 없이 지우고 싶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나의 발자취의 기록으로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지우지 않는 쪽을 택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얼마 전 교수님께 상담을 받으면서 <제가 이상 시인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이쪽으로 연구를 해보고 싶어요>라고 했더니 어려운 길을 간다는 반응이셨다. 나는 그 반응이 왠지 정답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길이 아니면 정말 안 될 것 같아요, 그에 대한 연구를 안 하면 삶이 불행해질 것 같아요, 와 같은 확고한 자기 확신이 없음은 물론이다. 내게 그런 확신은 없다. 정말 없다. 교수님은 방향을 정한 이상 돌아보지 말고 그 목표를 향해 사활을 걸고 달려가라고 하시면서, 만약 남자친구가 이를 방해하면 그냥 버리라고 (교수님은 유머러스하시다) 하시는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감기에 단단히 걸리신 교수님 방을 나오면서 나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하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대학원이라. 모교 대학원에서 낯익고 정 많은 교수님 밑에서 창작을 공부하면서 석사를 따는 길을 굳이 마다하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 나에게 아무도 진지한 우려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단지 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나만이 그런 나에게 <진짜 할 수 있겠어?>하고 묻는다. 이사 날짜를 앞두고 오래 지낸 동네에 뒤늦게 정이 드는 사람처럼 나는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모교에 대한 미련 같은 애정을 느낀다. 정확히는, 학교에 대한 애정보다는 학교에서 만난 몇몇 착한 사람들과 헤어지기 싫은 마음 같은 것이다. 그들 속에는 교수님도 계시고 또래의 학우들도 있다. 일상에 깃든 고민과 함께, 어제는 예측하지 못한 오늘의 커다란 기쁨들을 품에 안고 두 다리를 건강하게 혹사시키고 싶은 마음에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가는데, 밤하늘에 완벽한 모양의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밤의 매끄러운 어둠이 누군가의 얼굴이라고 한다면, 그믐달은 그 깨끗한 뺨에 난 손톱자국 같았다. 노오란 손톱자국에서 나는 상처의 빛을 보았다. 그믐달빛보다 하이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친구 사이로 보이는 젊은 남자 두 명이 한 명은 쭈그리고 앉아서, 또 한 명은 한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조금 어정쩡히 서서 고양이를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여고생 두 명이 아니라 젊은 남자 두 명이라는 것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와, 저 남자들, 까지만 생각하고 뒤의 생각은 잇지 못했는데 아무튼 굉장히 보기 좋은 모습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고양이는 세상 더없이 편안한 식빵 자세로 앉아 두 남자의 무뚝뚝한 듯 애정 어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30년대 문인들의 실명 소설을 쓰는 일이 있다면, 그리고 오늘 본 일상의 좋은 장면을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본 장면을 소설 속에 삽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면서 그믐달과 눈맞춤을 계속하며 걸었다. 추운 저녁이었다. 이상이라면 무조건 앉지 않고 서 있는 쪽이다, 라는 근거없는 생각을 하면서 추위를 쫓기 위해 잠시 머릿속으로 그려본 장면에서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고, 고양이는 제 나라에서 길 잃은 우울한 조선 고양이. 어리지 않고 늙은 놈이다. 암컷일 수도 있다. 새끼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우울한 조선의 늙은 암컷 고양이. 사실 수컷이든 암컷이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쯔쯔, 혀를 차게 하는 험한 몰골의 고양이다. 붉은 저녁이 저물고 있다. 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은, <예술(藝術)이라는 허망(虛妄)한 아궁지 근처(近處)에서 송장 근처(近處)에서보다도 한결 더 썰썰 기고 있는 그들 해반죽룩한 사도(死都)의 혈족(血族)들 땟국내 나는 틈에가 끼어서>, 자신의 <계집의 치마 단속곳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버선 켤레를 걸레를 만들어 놓았고, 검던 머리에 곱던 양자(樣姿), 영악(獰惡)한 곰의 발자국이 질컥 디디고 지나간 것처럼 얼굴을 망가뜨려 놓았고, 지기(知己) 친척(親戚)의 돈을 뭉청 떼어먹었고, 좌수터 유래(由來) 깊은 상호(商號)를 쑥밭을 만들어 놓았고, 겁쟁이 취라자(取利者)는 고랑때를 먹여 놓았고, 대금업자(貸金業者)의 수금인(收金人)을 졸도(卒倒)시켰고, 사장(社長)과 취체역(取締役)과 사돈과 아범과 애비와 처남(妻男)과 처제(妻弟)와 또 애비와 애비의 딸과 딸, 이 허다중생(許多衆生)으로 하여금 서로 서로 이간을 붙이고 붙이게 하고 얼버무려서 싸움질을 하게 해놓았고, 사글세방(貰房) 새 다다미에 잉크와 요강과 팥죽을 엎질렀>다고 울며 웃는, 그러한 사람의 분위기를 얼굴에 수염만큼 묻힌 고단한 형상이 어딘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지지리도 고난하여, 또는 아름답게도 불행하여, 같은 말로 묘비명의 서문을 열면 어울릴 것 같다. 그는 때 절은 암컷 고양이의 거친 몰골을 눈짓으로 힐끔 훔쳐볼 뿐, 그에 대한 어떠한 헤픈 감상도 덧붙이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붉은 저녁이 몰락하고 있다. 조용하고 고집스러운 자존심을 자중한 산호편처럼 지켜온 삶에서 무릎의 유연함을 배우지 않은 시인은, 그 처참하고 처연한 고양이의 눈망울을 씁쓸한 듯 내려다볼 뿐, 함부로 무릎을 굽혀 그것의 더러운 머리를 만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보여지는 것보다 따뜻하다. 그런 시인의 옆에서 고양이의 야윈 몸통을 스스럼없이 긁어주고 있는 사내는 시인보다 덩치가 조금 더 크고, 붓을 오래 쥔 손을 갖고 있다. 너 어디서 왔냐. 밥은 먹고 다니냐. 하고 묻는다. 야옹이는 그의 손길에 안정감을 느끼는지, 더러운 흙바닥에 거리낌 없이 길게 드러누우면서 아양 아닌 아양을 떤다. 시인은 속으로 경악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옹이 얼굴은 무척 편안해 보인다. 늙은 길동물의 타락한 몸을 슥슥 투박하게 쓰다듬어주는 손의 주인은 왼손 약지에 흰 붕대를 동여감고 있다. 단지한 것이다. 여자 하나를 속이려고. 또는 여자 하나를 얻으려고. 그는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피로 '罪' 한 글자를 썼다고 한다. 죄. 죄가 많은 저녁이 서서히 스러지고 있다. 붓을 쥐는 사람, 펜을 드는 사람, 새끼를 낳은 고양이 가운데 무결한 이는 아무도 없다. 무해한 이도 없다. 그들은 저마다의 독을 가지고 있고, 어둠이 오는 것은 그들이 앙상한 호흡으로 저물녘 하늘에 그들의 독을 풀어버려서이다. 독이 풀린 하늘은 서서히 검어진다. 그들 모두가 사라진 뒤에야 밤하늘에 걸린 조각달은 안개 같은 구름결에, 그 위에, 지상의 중생은 애리다, 하흘려 적는다.


  물론 이러한 장면을 집에 오는 길에  상상한 것은 아니고, 지금 새벽에 글을 쓰면서 더듬더듬 적어본 것이다. 이제 슬슬 자야지. 시험이다. 글을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않는 문제이다. 나는 그러니까, 글을 있는 시간이 없어서, 현실보다 안락한 공간이라는 인식을 주는 속에서 오래 머물 없어서 현실을 상대로 불만을 터뜨리던 시절보다는 조금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누군가에겐 열정의 낙화나 타락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 마음이 그러함은 변하지 않는다. 내일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여섯 시 이후에 학교 정문을 나설 듯하다. 그러면 붉게 지는 노을은 못 보는 것이다. 아마도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을 듣는 동안 창밖으로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무익한 첨언) 스스로를 이상의 죄우(罪友)라 일컫는 M씨가 손가락을 자른 것은 스물두살 때의 일이고, 이상의 얼굴에 종생기적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그보다 이후의 일이다. 글에서 스물두살 즈음의 M씨와 종생기를 향해 산호편을 휘두르는 이상이 같은 공간에 놓인 것은 그러므로 문학적 허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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