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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Dec 28. 2024

한 무더기 꽃은

단편소설


 새벽은 글을 쓰기 좋은 시간이다. 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은, 새벽이다. 학원 강사인 미혜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수업이 끝나고 내려오는 미혜를 만나 근처 백반집에 가 저녁을 때웠다. 미혜는 나를 선욱 씨라고 불렀다. 선욱 씨, 배고팠지? 그냥 먼저 먹어도 된다니까……. 미혜는 나를 추운 바깥에서 기다리게 한 것이 못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미혜의 물잔에 시원한 보리차를 따라주며 활짝 웃었다.


 미혜와의 저녁 식사는 차분하고 아늑하며 또 다정스러웠다. 미혜는 다정한 여인이었다. 나는 혼자 머릿속으로 그녀의 사십대를 그려보곤 했다. 웃을 때 눈가에 접히는 상냥한 주름이 싫기는커녕, 그걸 생각하는 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미혜는 나이가 들어도 늘 지금처럼 상냥하겠지. 백반집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나도 모르게 그녀와의 미래를 상상해버렸고,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멍청하게 있으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고등어 반찬이 나왔다.


 고등어 반찬은, 교복 시절 나의 친한 벗의 양모께서 자주 내주던 반찬이었다. 나는 잠시 나의 친한 벗을 생각했다. 연은 얼마 전 폐렴을 진단받았다. 단정하고 조용한 손놀림으로 식사를 하던 미혜가 내게 또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고, 나는 이번엔 그녀에게 숨기지 않고 친구 걱정을 늘어놓았다. 연이 학창 시절에 얼마나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는지, 얼마나 독특한 농담을 잘 생각해냈는지, 또 얼마나 다재다능했는지 그런 세세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을 수는 없었으나 나는 그를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놈’이라고 했다. 미혜는 내게 그런 친구가 있었냐고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폐렴이라니…….


 상냥한 미혜는 일면식도 없는 낯선 남자를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를 안타까워 하는 것은 내 몫이라고 하며 그녀의 줄어들지 않는 밥 위에 고등어 살을 발라서 얹어주었다. 나의 수작질이 그녀에겐 퍽 잘 통했다. 그녀는 자신이 발라서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수줍은 얼굴이었다. 나의 길이라고 굳게 믿은 예술을 버리자 현실은 내게 그녀라는 선물을 주었다. 그녀는 내 삶의 위로처럼 다가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그림쟁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얼마나 그림에 매달렸는지도 물론 알지 못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그림을 떼어버렸고, 이제 남들처럼 평범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평범한, 그러니까 성공적으로 평범한 인생엔 꼭 미혜 같은 여자가 있어야 했고, 그리하여 나의 수작질은 날로 교묘해져 갔다. 미혜는 내가 뭘 하든 웃어주었다.


 미혜야. 여자는 말이지,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말하는 남자를 조심해야 해.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모호하고 의미심장한 말로 미혜의 평온함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시골집의 시계가 생각나는 둥근 테두리의 벽걸이 시계가 8시를 가리킬 즈음, 나와 그녀는 백반집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미혜야. 응? 우리 집에서 팥죽 먹고 갈래? 미혜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며칠 후가 동지라는 것을 생각하다가 그만 그런 말이 실수로 튀어나와 버렸던 것이다. 나는 민망해져 버렸다. 미혜도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 그냥 한 말이야. 라고 다소 구차하게 주워담으려 하니, 미혜가 불쑥 좋다고 했다. 좋아? 내가 다시 묻자 그녀는 대신 새알심이 있는 팥죽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길로 죽집에 들어가 새알심이 들어간 단팥죽 2인분을 샀다.


 전등 불빛은 약하고, 찬기가 감도는 집에서 말없이 팥죽을 먹었다. 그녀가 추워하는 것 같아서 난방을 세게 틀고 자리에 돌아와 그녀에게 담요를 건넸다. 그녀는 웃으면서 담요를 받아 들고 그것으로 무릎을 덮었다. 은근히 숨이 막히는 분위기였으나 조금 수줍은 듯 고개를 반쯤 숙인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1인분도 양이 많아서 두 사람이서 1인분을 나누어 먹었다. 나는 나의 시선을 은근히 피하는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느라 입맛이 없었고, 그녀는 그녀대로 어색한지 많이 먹지 못했다. 새알심 어때? 내가 물었다. 응, 맛있네. 미혜가 답했다. 새알심은 부드럽고 졸깃해서 맛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결코 서두르고 싶지 않아서, 간다는 미혜를 붙잡지 않았다.


 미혜는 가기 전, 현관에서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말했다. 동짓날에도 팥죽 먹을까? 묘하게 어린애 같아진 그녀의 말투가 좋았다. 나는 당연히 그러자고 했다. 나는 아파트 입구까지 그녀를 배웅했고,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떠나니 집은 우중충해 보였다. 나는 먹지 않은 1인분의 팥죽통을 양손으로 만져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것을 품에 안고 다시 밑창이 닳은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한 것은 이 팥죽 때문이었다. 나는 병에 걸린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의 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주택은 서향이었고, 낮이나 밤이나 쓸쓸해 보였다. 그는 늘 대문을 걸어놓지 않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점퍼 안에서 팥죽통을 끌어안은 채 낡은 파랑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엔 못 보던 나무가 있었다. 라일락 나무인 것 같았다. 지금 계절은 겨울, 라일락 나무는 죽은 것 같았다. 검게 마른 잎들이 이미 죽은 듯한 가지에 겨우 붙어있었다. 나는 불현듯 어떤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반짝이고 떠올라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떻게 바로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덧붙여야 하리라.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대문도 아니고 현관문이! 죽음의 기운을 풍기는 불길한 나무에 이은 한뼘이나 열린 현관문. 나는 “연! 나야. 어딨니.”하고 그를 찾으며 오래된 목가구 냄새가 가득한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열린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집안은 냉골이었다. 나는 불길한 기분이 엄습하였다.


 연! 나야, 어딨니.


 나는 탁자 위에 간신히 온기를 유지하고 있는 팥죽통을 내려놓고, 점퍼도 벗지 않은 채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나의 발소리에 집안 전체가 삐걱거리는 듯했다. 이 층에 다다르니 아주 살짝 방문이 열린 것이 보였다. 열린 방문 틈새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방안은 흐릿했다. 곧이어 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쑤셨다. 책상 앞에 연이 보였다. 그는 멋진 소설을 쓰겠다는, 그가 입이 닳도록 말하는 그 집념을 불태우다가 피로에 못 이겨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깊이 잠이 들었는지, 그는 내가 그를 찾으며 온 집안을 휘젓고 돌아다닌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한쪽 뺨을 책상에 대고 잠이 든 그는 안경도 벗지 않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주고 그것을 잘 접어 조명 아래 두었다. 평소에 그라면 깨고도 남았을 기척이건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낮은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은 어딘지 고단해 보였다. 몇 개의 원고 뭉치가 책상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재떨이엔 반쯤 태우다 만 담배 꽁초와 보드라운 잿더미가 수북했다. 그는 폐인처럼 보였다.


 그의 엷은 숨결에 원고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한시름 놓고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방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꼭 어딘가 떠날 사람의 방 같은, 묘하게 무정한 깔끔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혜 방의 단정함과는 사뭇 달랐기에, 나는 자고 있는 그를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무슨 꿈을 꾸는지 미간을 설핏 구겼다가 다시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 흔들어 깨울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무척 피곤해 보였기에 바로 생각을 접었다. 그의 한쪽 뺨에 깔린 원고지 위엔 무언가 잔뜩 적혀 있었다. 멋진 소설을 쓰겠다는 집념의 소산이겠지? 나는 몇 글자 읽어보려 했지만 불빛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불빛을 밝히면 그의 잠이 방해 받을 것 같아서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추운 바람은 계단을 타고 올라와 이 층 그의 방에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책상 옆에 있는 낮은 침대에서 뒹구는 담요를 가져와 그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그의 표정이 조금 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도 추웠던 것일까. 나는 한참 뒤에 방을 나섰다.


 나는 다시 삐걱거리는 계단을 내려와 열려 있는 현관문을 닫았다. 들어올 때 경황이 없어서 현관문도 닫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차분해진 기분으로 그의 낡은 집을 돌아보았다.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야 할 거실이 웬일로 깨끗했다. 나는 부엌으로 갔다. 가스버너 위에 냄비가 있어서 열어보니 차게 식은 돼지 김치찌개였다. 차게 식은 것을 보니 저녁을 일찍 먹은 모양이었다.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거리를 보니 그제야 연이 그놈 같아서 안심 아닌 안심이 되었다. 나는 괜히 수도꼭지를 틀어 졸졸 물이 잘 흘러나오는지 확인했다. 온수에 맞춰놓고 물을 틀었건만 손을 대보니 물의 온도가 찼다. 수도꼭지를 온수 방향으로 완전히 꺾고 잠시 기다렸다가 손을 대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쯧쯧 혀를 차며 수도꼭지를 잠갔다. 손으로 바닥을 만져보니 미약하게 난방이 들어오긴 했다. 보일러실이 집밖에 있어서 나는 신발을 대충 꿰어 신고 밖으로 나갔다. 온수배관이 얼어 있어서 보일러실에 히터를 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아도 냉기는 여전했다. 나는 왠지 진이 빠져서 소파 위에 털썩 앉았다. 탁자 위에 놔둔 팥죽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아무 생각 없이 한 대를 피웠다. 불빛이 약한 전등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나는 소파에 기댄 채 아주 오랫동안 담배를 태웠다. 목가구 냄새가 났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그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고,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2학년으로 진급한 그는 갑자기 소설이 쓰고 싶다고 했다. 몇 달에 한 번꼴로 읽을 수 있던 그의 습작은 일반적인 소설과 달랐다. 마치 그의 미로 같은 정신 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난해한 소설들이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정신이 이상했고, 그럼에도 순수했고, 자신만의 이상을 추구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은 때로 현실에 가로막혀 좌절되기도 하고, 현실을 좌절시켜가며 기어이 이뤄지기도 했는데, 어느 쪽이든 소설의 인물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자아의 변명과도 같은 소설은 질렸다는 선언과 함께 그는 한동안 완전히 다른 장르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탐정 소설, 공포 소설, 멜로 소설, 심지어 무협 소설까지 다양하게 도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멜로 소설이 가장 잘 팔렸다. 이유는 관능적 묘사가 뛰어나서? 나는 그가 쓴 관능 소설류는 읽어본 적 없었다. 그냥 읽기가 싫었다. 관능 소설 다음으론 탐정 소설이 인기였던 것 같다. 이십대 초반, 그는 돈을 좀 만졌다. 그때 나는 한 푼이 아쉬운 시절이었는데 그를 만나면 그가 술값을 턱턱 내주어서 자존심도 없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아무리 한심하게 세상을 욕하며 주정을 부려도 그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나는 그런 그가 못내 고맙기도 했고, 동시에 짜증스럽기도 했다.


 자존심만 있었던 것 같다. 없기는 개뿔. 그가 베푸는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속으로 검은 마음만 키워갔다. 나는 참 못난 인간이다. 이제 그가 나보다 가난하고 불쌍해지니 그를 챙길 마음이 생긴 것인가. 그러나 그는 이미 폐렴이다. 죽는 병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 병이 나의 방치 때문은 아니지만, 연의 폐렴은 어째선지 나의 죄책감을 이렇게 자극한다. 정말 못났다. 어쩌자고 폐렴에 걸린 것인가. 온수배관은 왜 얼어붙게 놔둔 것인가.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미혜를 생각했다. 마음이 슬플 땐 그녀를 생각했다.


 삼 년 전부터, 연은 그에게 돈을 좀 만지게 해주었던 관능 소설이니 탐정 소설이니 하는 것들을 버리고 다시 자전적 소설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의 자전 소설류는 이전에 비해 더욱 상상의 언어가 풍부해졌고, 상징을 다루는 솜씨도 좋아졌다. 그는 때로 현실이 아닌 그의 창작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듯 보였다. 그의 초췌함은 열정의 과다가 원인이었다. 상냥함으로 그를 키워준 양모가 돌아간 후 그는 잠시 방황했지만, 금방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다 실패로 끝났다. 너, 왜 C를 내버렸어?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그녀와 애인 사이였어? C는 나의 친한 후배의 여동생이었고,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나까지도 후배의 눈치를 묘하게 살펴야 했다. 이건 쓸모없는 잡소리다. 말이 많아지면 늘 실수를 하게 된다. 이래서 나는 웬만하면 글을 쓰려 하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는 남자는 예술 나부랭이에 연연하지 말고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예술 나부랭이에 연연해버렸고 아버지를 크게 실망시켰다.


 나의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엔 여자들의 마음을 이끄는 뭔가가 있었는지, 나의 그림을 보고 내게 다가온 여자들이 몇 명 있었다. 나는 죽은 개를 그렸을 따름이다. 나는 아사라는 제목에 알맞은 그림을 그렸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외로운 사람이 등장하는 풍경화를 자주 그렸을 뿐이다. 그 외로운 사람은 나와 일면식 없는 남자였다. 그녀들은 아마도 내가 아닌, 황량한 들판 속의 그 정체 모를 남자의 묘연한 분위기에 이끌렸던 것 같다. 누군가는 그 남자가 나와 닮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상상적 언어로 빚어낸 소설 인물과 같은 예술적 존재였다. 나는 다시 미혜를 생각했다. 이번엔 기분이 다시 나아지지 않았다. 추웠다.


 어느 오래된 여름날, 팔이 짧은 셔츠를 입은 연이 다가와 내게 글을 내밀었다. 그는 워낙 표정으로 기분을 맞출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날은 의기양양한 기분이 느껴졌다. 나는 순순히 읽었다. 아주 더운 날이었고, 목덜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익숙한 그의 문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몽롱한 분위기, 고차원적인 상징들, 멍청한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난해하고 어려운 소설이었다. 그러나 그건 확실히 자기 표현의 욕구에서 비롯된 글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예술에의 욕구가 씨앗이라면 그것을 발아시킨 물은 그의 설움이었던가. 모르겠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입으로 할 수가 없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욱, 어때?


 나는 매력적이라고 대답했다. 정확히 뭐가 매력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무 무책임하게 뱉은 것 같아서 뒤에 내가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감상의 한 조각을 덧붙였다.


 네 글은 너무 서러워서 읽고 있으면 나까지 서러워져.


 그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그건 나의 진심이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내가 그의 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에도 자꾸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으므로 늘 빠져서 읽기는 하였지만. 비판조로 말한 나의 감상에 당황을 보인 것도 잠시 그는 착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원고를 가져갔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난방을 최대로 키웠는데도 집안은 쉬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이 집의 성격. 어쩐지 그를 닮은 것도 같았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나는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데워 먹으라는 메모와 함께 팥죽을 거기 그 탁자 위에 놔두고 나는 어두운 새벽길을 걸어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집도 서향이었다. 미혜의 살냄새가 사라진 집은 넓고 공허했다. 그런데 그의 집은 이 집보다 더 컸다. 그러니 고요함도 더 클 것이다. 나는 서랍을 열었다. 솔이 다 나간 붓은 외로워 보였다. 나는 그것의 막막한 단잠을 차마 깨우지 못하고 한참 바라보다가 서랍을 닫았다. 그는 가끔 나 들으란 듯 혼잣말로 ‘나쁜 짓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럼 하거라, 하니 알겠다며 비장하게 일어나서 노상에서 질 나쁜 인간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까지 끌려간 그였다. 술이 문제였을까. 그는 어딘가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타박을 해오는 내게 그는 너무나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하면서 다신 싸움 따윈 하기 싫다고 학을 뗐다. 그 모습은 정말 그다워서 웃음이 새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라면, 마음을 따르라 했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서랍을 열었다. 붓을 꺼냈다. 아직 마음을 갖지 못한 여자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쥐었다. 이 붓으로 나쁜 짓을 하고 싶었다. 온갖 나쁜 건 다, 하고 싶었다.


 붓은 다시 서랍 속에 들어갔다. 나는 펜, 붓만큼 훌륭한 펜으로 꽃을 한 무더기 그렸다. 라일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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